그런데 영화 속 엠마와 루이스가 사랑에 빠지는 동안, 여배우 갱스부르에게 빠져버렸다. 올해 서른여섯, 솔직히 비슷한 나이 할리우드 여배우처럼 ‘탱탱’하지는 않다. 노메이크업에 눈썹만 짙은 얼굴은 어딘지 나른한 느낌. 그게 바로 매력이다.
그는 프랑스의 작곡가 겸 가수인 세르주 갱스부르와 영국의 배우 겸 가수이며 ‘사모님’들의 필수품, 에르메스 ‘버킨백’의 뮤즈로 유명한 제인 버킨의 딸이다. 14세에 출연한 ‘귀여운 반항아’의 사춘기 소녀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당시 국내에선 영화보다 주제곡 ‘내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게 됐을까(Sara Perche Ti Amo)’가 더 히트를 쳤다. 이후 프랑스의 ‘하이틴 스타’로 군림했고 ‘제인 에어’(1996) 이후 성인 연기자로 안착했으며 최근 미셸 공드리의 ‘수면의 과학’에도 나왔다.
사람들이 ‘파리지엔’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얼굴인 그는 영화 속에서 패션 전문가들이 입에 달고 사는 ‘프렌치 시크’의 정수를 보여 준다. 일단 머리는 부스스하게 풀거나 잔머리가 많이 나오게 틀어 올린다. 소매를 둘둘 걷은 셔츠나 빈티지풍 티셔츠에 스트레이트 진이나 레깅스를 입는다. 물론 부츠 안에 넣어서. 위에는 밀리터리풍의 재킷이나 회색 헤링본 코트를 걸치고 매번 똑같은 블랙 크로스백을 멘다. 옷이 바뀌어도 두 줄짜리 목걸이도 그대로.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차림이다. 정돈된 뉴요커 스타일과는 달리, ‘나는 패션에 관심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듯, ‘무심하게’ ‘아무렇게나’ 걸쳐 입는 게 특징이다.
파리에서 활동하는 패션 칼럼니스트 심우찬 씨는 그의 책(파리 여자 서울 여자)에서 “파리를 패션의 도시라 하지만 차려 입은 사람들은 대부분 외국인이고 파리 사람들은 오페라 극장에서도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이라고 했다. 그는 동네 빵집에서 제인 버킨과 마주쳤는데 물 빠진 청바지와 낡은 화이트 스웨터에 버킨백을 든 모습이 멋졌단다. 물론 버킨백은 무지 비싸다(소가죽은 900만 원, 악어가죽은 3000만 원. 헉!). 그의 말은 명품이든 아니든 자기 스타일대로, 자신의 개성을 지키는 게 ‘프렌치 시크’라는 것이다.
뭐든 죽기 살기로 해야 하는 사회, 가끔 짜증이 난다. 심지어 옷 입는 것까지도 ‘열심히’ 해야 할 듯한 분위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힘 팍팍 주고 ‘나 예뻐요?’라는 태도, 피곤하다. 모든 여성이 ‘패셔니스타’인 한국인데 다들 ‘프렌치 시크’를 동경하는 이유는 힘을 뺀 그 ‘무심한 태도’가 ‘쿨’해 보이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만날 밤새우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며 1등하는 애보다는 항상 노는 것 같은데 1등하는 애가 더 부러웠던 것처럼.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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