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손예진은 들어오자마자 맥이 탁 풀린 표정으로 “안 먹으면 쓰러질 것 같다”며 과일주스를 들이켜고는 연방 치즈 스틱과 생크림 케이크에 포크를 가져갔다. 10일 개봉하는 영화 ‘무방비도시’(15세 이상)가 처음 공개된 4일 기자 시사회 직후, 극도로 긴장했나 보다. 영화에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더니.
무방비도시는 소매치기 조직과 ‘한국의 FBI’라 불리는 광역수사대의 대결이다. 그 와중에 형사인 조대영(김명민)은 조직 보스 백장미(손예진)에게 끌린다. 그들의 가족사도 얽혀 있다. 이 영화에서 손예진은 차가운 표정으로 “사내 새끼들이 다 거기서 거기지…” 하다가 여우같이 계산된 몸짓으로 남자를 유혹하고 파멸시킨다.
인터뷰가 시작됐다. 그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또다시 ‘생글생글 모드’로 돌아갔다.
―전직 소매치기에게서 기술을 배웠다고 들었다.
“40대 전직 소매치기 여성을 만났지만 살아온 얘기만 들었고 진짜 기술은 형사에게서 배웠다. 지금 남대문경찰서에 계신 소매치기 전문가 오연수 반장님이 ‘벙카치기’(양복 안감을 째고 지갑을 빼내는 기술), ‘기계’(소매치기 기술자) 등 각종 은어와 기술을 가르쳐 주셨다. 그분들은 눈빛만 봐도 소매치기임을 안다.”
“지하철이나 버스가 위험하다. 명동이나 동대문처럼 사람 많은 곳, 특히 동대문은 현금이 많은 곳이다. 지갑은 가방에서도 안주머니에 깊숙이 넣어야 한다. (기자의 가방을 가리키며) 저렇게 큰 가방은 몸에 붙지 않아 더 위험하다.”
남자 짓밟는 무자비한 냉혹女로… 몇년 뒤엔 또 어떻게 변할지 저도 궁금해요
―본격 ‘팜 파탈’은 처음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섹시하게 나와야 하는 게 힘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부끄러웠다. 심지어 시나리오에 ‘백장미의 섹시함에 조대영이 허걱 놀란다’ 같은 지문도 있었다.” (영화 속에서 그는 온몸으로 섹시함을 표현한다. 특히 조대영의 가슴이나 허벅지를 슬쩍 스쳐 지나가는 손길이 유혹적이다. 반면 베드신은 싱겁게 끝난다)
―감독은 영화가 ‘운명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백장미는 엄마도 소매치기고 배운 게 그것뿐이다. 조대영과도 운명적으로 얽혀 있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장미가 손 씻은 만옥 이모(소매치기 전과 17범으로 배우 김해숙이 연기한다)를 찾아가 같이 일하자고 설득할 때다. 서로 ‘나도 좀 살자’고 절규하고 있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다들 자기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백장미는 조대영을 사랑한 것인가.
“사랑이라기보다는 ‘끌림’이다. 백장미는 남자는 다 자기 발밑에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다. 조대영이 넘어오니까 ‘너도 역시’라고 생각하지만 강하게 끌린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간다. 요새 이런 여자 많지 않나.”
―20대 여배우(26세)로서는 유일하게 유부녀와 미혼 여성 배역이 다 잘 어울린다.
“참 이상하다. 3년 전만 해도 다들 ‘왜 아픈 역만 해요?’ ‘왜 청순한 역만 해요?’ 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나는 속에서 차곡차곡 쌓아 가고 있으며 한두 작품으로 평가받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나이에 비해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다고들 한다. 배우는 계속 변한다. 3, 4년이 지나면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예전엔 진짜 ‘안티’ 팬이 많았는데 연기로 극복한 것 같다.
“‘옛날에 좀 놀았다’ ‘싸가지가 없다’ 하는 소리 들을 때 ‘저러다 말겠지’ 했는데 사실은 내 내성적인 성격이 오해를 부른 측면이 있다. 사실 선배들을 봐도 활기차게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고 그러지 못했다. 억울할 때마다 ‘언젠가 진실은 밝혀진다’고 생각했는데 살다 보니 진실은 안 밝혀질 수도 있더라. 이제 내가 좀 더 표현하고 다가가려 한다. 흔히 ‘낯을 가린다’고들 하지만 그건 변명이다. 낯을 가리더라도 먼저 다가가서 얘기하다 보면 변한다.”
―다음 작품은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하는 ‘아내가 결혼했다’(감독 정윤수)다. 잘 어울린다.(이 영화에서 그는 일부일처제에 도전해 두 남자와 동시에 결혼하는 여자 역할을 맡았다)
“아! 혹자는 어울린다고 하는데 그것도 좀 이상하고, 안 어울린다는 말도 들었는데 그것도 기분 나쁘더라. 하하.”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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