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홍길동도 있다. 조선 시대에 웨이브 머리에다 갈색 선글라스. 특기는 주색잡기요, 취미는 사기도박인….
2일 처음 방영된 KBS2의 판타지 사극 ‘쾌도 홍길동’(수목 오후 9시 50분)에서 시정잡배가 길동(강지환·31)에게 묻는다. “네가 한양 바닥에서 그 유명하다는 홍 판서네 개차반 천출 홍길동이냐?” 개도 안 먹는다는 ‘홍길똥’ 이름 석자는 저잣거리에서 심지어 욕이다. “에라 이 길동이만도 못한 놈아.”
그런 그가 호형호제(呼兄呼弟)하지 못하는 서러움을 푸는 법도 이색적이다. 허이녹(성유리)에게 배운 청나라말로 아버지를 불러 본다. “푸…푸칭(父親), 되게 이상하네.”
드라마 ‘쾌걸 춘향’ ‘환상의 커플’의 홍미란 정은 자매 작가가 재창조한 홍길동은 대강 이렇다. 허균의 원작에 나오는 홍길동에게 ‘굴욕’이지만 강지환에게도 이 캐릭터는 파격이다. 드라마 ‘굳세어라 금순아’의 구재희, ‘경성스캔들’의 선우완 등 멜로에서 ‘쿨(Cool) 가이’로 나왔던 그에겐 웃기는 연기와 액션 장면은 처음이다. “다른 배우보다 캐스팅이 일찍 정해져 혼자 액션 스쿨 다녔어요. 황비홍, 동방불패 등을 섭렵하고 캐릭터의 방향을 저우싱츠로 잡았죠. (드라마에 쓰고 나오는 갈색 선글라스를 가리키며) 아, 그 ‘똥그란’ 안경요? 120년 된 거예요. 화보 촬영을 위해 들른 뉴욕 벼룩시장에서 건졌어요. 봉, 시계, 피리, 미니 목탁…. 길동이 소품의 90%는 모두 제가 준비한 거라고 보시면 돼요.”
“배우 본연의 모습에 캐릭터라는 겉옷 하나 걸치는 게 연기”라는 연기론을 펼치던 그는 홍길동이라는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은근히 캐릭터를 ‘즐기는’ 듯했다.
코믹퓨전사극이라는 장르를 표방한 ‘쾌도 홍길동’에서는 청나라 가마를 ‘외제 가마’라며 “승차감이 좋다”는 둥 CF에서 나올 법한 대사를 패러디한다. 나이트클럽 같은 술집에서도 랩과 섹시 댄스가 넘실댄다. 게시판에서는 “어색하다” “신선하다” 등 논란이 일고 있다.
“제 취향이 기상천외한 걸 좋아해요. 다른 사람들에겐 유치할 수도 있고 엉뚱할 수도 있죠. 그런데 시청자 입장에서 봤을 때 홍 자매 작가 스타일이 딱 맞아요. 대본만 읽어도 혼자 낄낄대니까.”
이번 작품에 임하는 각오는 비장하기보다 겸허하다. ‘불꽃놀이’ ‘90일, 사랑할 시간’ ‘경성스캔들’ 등에서 부진한 시청률을 만회하겠다는 욕심도 비웠다.
“전작까지는 시청률에 연연한 게 사실이에요. 그런데 요즘에는, 다 잘될 것 같다고 잘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철이 든 거죠. 최선을 다하면 그 이상의 것은 제가 바라는 게 아닌 거 같아요.”
지난해 말 한 시상식에서 그는 한지민을 이상형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상대역 성유리와의 호흡은 어떨까. 그는 “(성유리는) 의외로 번지점프도 겁내지 않는 담대한 성격을 지녔다”며 한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매번 촬영장에서 처음 만나 하는 말이 ‘여기가 어디야?’예요. 하루가 멀다 하고 속초 완도 태안 등 동에 번쩍 서해 번쩍 옮겨 다니니….”
앞으로 ‘난봉꾼’ 길동은 활빈당과 함께 영웅으로 변모해간다. 차츰 철들어가는 길동처럼 강지환도 장난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한마디 건넨다.
“조금 있으면 길동이가 가렴주구하는 고위 관료에게 똥물을 뿌리는 장면이 나와요. 평소 정치에 관심은 없었는데 요즘 정치인들 하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요. 어찌됐든 이제 난 홍길동이니까. 그 장면만큼은 제대로 해서 국민의 등을 긁어 주는 길동이가 되어야겠죠.”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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