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이혼이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먼저 결혼을 해야겠다”고 했다가 거의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다. 궁색한 변명을 하자면 사랑한다고 믿었던 두 사람이 결혼을 하고, 실망하고, 갈라섰다가 결국 서로를 다시 이해해가는 드라마 속 성숙한 사랑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
변해가는 세상의 단면을 포착하는 영민함은 좋은 드라마가 가지는 미덕이다.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의 서른여섯 미혼 변호사가 애 딸린 이혼남 때문에 하는 고민이 남의 일 같지 않고,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의 ‘줌마렐라’ 스토리에 시청자들이 반응하는 것은, 이제는 세상이 뭔가 많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란 말이다.
사고 싶을 땐 돈이 없고 살 수 있을 땐 머리가 벗겨져 있는 이른바 ‘스포츠카의 비애’는 언제부턴가 ‘사랑’이라는 단어에 적용을 해도 별로 어색하지 않게 됐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오다 보니 괜찮은 사람들은 다 재주 좋게 시집, 장가를 갔다. 이럴 때 내 앞에 나타난 이상형이 아홉 살 박이 성격 만만치 않은 딸의 아빠라니. 유일하게 자신을 연예인이 아닌 한 사람으로 대해주고, ‘뭐 묻은 팬티’까지 이해해 주는 이는 어느 순간 서른아홉 아줌마로 변신해 있는 초등학교 첫사랑이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만한 나이가,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사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때가 점점 늦어지고 있는 걸 드라마를 보면서 실감할 때, “세상이 변했으니까” 인정하면서도 조금은 서글프다.
‘우리들의 천국’과 ‘사랑이 꽃피는 나무’를 보면서 대학생이 되면 정말 저렇게 연애만 하면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이제, 20대를 위한 드라마는 20대 조차 볼 시간도 여유도 없는 이 시대에,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이 430번이나 방송을 해도 아직 그 소재가 떨어지지 않는 이 현실에서, 30대 이상의 사랑이 드라마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때, 마치 젊은이는 이제 사랑할 권리조차도 빼앗겨 버렸나 라는 안쓰러움을 느낀다면 ‘오버’일까?
드라마란 현실을 버무려서 꿈을 보여주는 것. 드라마 속 힘든 늦깎이 사랑이 보는 이들에게 꿈을 꾸게 한다면, 우리 20대 젊은이들의 풋풋한 희망 또한 드라마에서 여전히 보고 싶다. 등록금 걱정에 지치고, 불안한 미래에 고민하는 20대들 힘냈으면 좋겠다. 드라마 ‘행복합니다’의 에다와 강석 커플, 그런 의미에서 파이팅이다.
이문혁 CJ엔터테인먼트 드라마 사업팀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