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했던 삶 담아두기 힘들어… 진정한 깨달음이란 뭘까요
여기 너무 다른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엄격한 계율과 불법을 지키며 수행해야 할 스님이지만 그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기행(奇行)’이라 부르는 자유분방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도 좋을 영화배우지만 자신을 엄격하게 관리해 왔다.
도무지 인연이 닿을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만다라’(1981년). 젊은 수도승 법운 스님이 술에 찌든 ‘땡초’ 지산 스님을 만나 진정한 깨달음의 길로 가는 여정을 그린 소설 ‘만다라’(김성동 작)를 스크린에 옮긴 영화다.
한 사람은 지산 스님의 실제 모델인 현몽(67) 스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 영화에서 주인공 ‘법운’을 연기한 안성기(56) 씨.
안 씨는 영화 출연 뒤 현몽 스님과 수차례 만나며 교유했다. 그러다가 소식이 끊긴 지 17년. 현몽 스님은 세계를 떠돌며 구도하다 돌아와 최근 불교 공(空)사상의 기본 경전인 금강경 해설서 ‘한 나무 아래 사흘을 머물지 않는다’(이가서)를 펴냈다.
그런 두 사람이 6일 밤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
안=스님 연락 받고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현몽=인도 네팔 히말라야 멕시코 등을 휘돌아다니며 밑바닥 삶을 경험했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히피들과 어울렸어. 카트에 담은 한 줌 짐이 세간의 전부인 그들이 마리화나를 피우며 내뱉은 인생, 우주, 영감(靈感)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들었지. 이게 진솔한 깨달음, 무소유구나 느꼈어. 나도 그렇게 살았지.
안=스님은 젊은 시절부터 자유롭게 방랑하며 수행하셨죠. 전 영화 ‘만다라’를 찍으며 한계와 경계를 벗어나고 싶은 젊은이의 고민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저는 지금도 제도권의 사람이고 지켜야 할 제약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니에요.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게 더 엄격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제약을 훌훌 털어버린 스님과 다르죠.
현몽=금강경은 마음을 비우고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쳐주지. 바로 무화(無化)야. 그런데 읽히지가 않아. 어려운 한문, 불교용어 때문이지. 5년 전 한국으로 돌아와 경북 청도의 산골짜기 집에서 수행하며 세상에서 제일 쉬운 금강경을 쓸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 3년간 열두 번이나 고쳐 썼지.
안=전 수십 명의 인생을 살다 보니 그네들의 삶을 다 담아두기가 힘들 때가 많아요. 그래서 영화 한 편의 촬영이 끝나면 그 사람의 인생은 제 밖으로 다 내보내죠. 어찌 보면 저도 매번 자신을 비우는 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깨달음이란 과연 뭘까요?
현몽=깨달음은 대단한 게 아니야. 누구나 이를 수 있지. 진리란 변하지 않으면 신선하지 않고 감동이 없어. 저마다 처한 삶을 즐기며 자신을 비우다 보면 어느새 깨닫게 돼. 삶 자체가 깨달음이지.
안=제가 출연한 영화 ‘아라한 장풍 대작전’에서 진정한 도(道)란 무엇인지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몇 겹의 커다란 쟁반을 머리에 이고 자유자재로 배달하는 식당 아주머니, 구두 수십 켤레를 양손 가득 들고 활보하는 구두닦이 등 누구나 일상 속에서 열심히 살다 보면 도인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일상 속의 깨달음을 강조하시는 스님 말씀과 꼭 닮았네요.
세 시간 넘게 계속된 이날 만남의 화두는 진정한 깨달음. 살아가는 방식은 달랐지만 평범한 일상에 깨달음이 있다는 생각은 똑같았다. 만남이 끝나갈 무렵, 현몽 스님은 “네 안에 부처가 있어”라고 되뇌었고 안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좋은 봄밤이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