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 하면서 돈까지 받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나요?” 노현정, 강수정, 박지윤, 최송현 등 이른바 젊은 ‘스타 아나운서’들이 줄줄이 사표를 내고 방송사를 떠나 화제가 됐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 오랜 세월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 바로 31년째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KBS 박경희 아나운서(53). 여자 아나운서는 결혼하면 퇴직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 그녀는 결혼한 후에도 뉴스 앵커에 발탁됐다. ‘그저 운이 좋아서’ 지금까지 있을 수 있었다고 자신을 낮췄지만 그 뒤에는 남모르는 노력이 있었다. 30년 넘게 마이크 앞을 지키고 있는 그녀가 요즘 정든 직장을 떠나는 후배를 바라보는 심경은 어떨까.
- 어렸을 때부터 아나운서가 꿈이었나.
“이제 정확히 31년 3개월이 됐다. 원래 교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TV를 보다가 아나운서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시험을 쳤다. 지금처럼 경쟁이 치열한 편이 아니어서 쉽게 면접까지 붙었다. 카메라 테스트를 받는데 그때 내가 방송에 적합한 목소리를 가진 것과 마이크 공포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 선생님의 꿈을 접고 아나운서를 선택한건가.
“아나운서 시험과 동시에 순위고사(현재 임용고사)를 봤다. 방송사에 합격해 이틀째 근무하는데 서울의 한 중학교에 배정됐다는 통지가 왔다. 집에서는 교사를 원했지만 방송사를 선택했다. 좀 우습지만 여의도의 KBS 건물이 근사해 보여 아나운서를 선택했다. 냉난방이 잘된 회사에 첫 눈에 반했다. 근데 이렇게 오래 다닐 줄은 몰랐다(웃음)”
- 당시 여자 아나운서는 결혼을 하면 퇴직하는 게 당연했다고 하던데.
“같이 입사한 동기들은 26∼27세 때 결혼하면서 회사를 그만뒀다. 나 역시 28세에 결혼하면서 퇴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1980년 12월 방송 통폐합이 되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다. 당시 이원홍 사장이 여성 인력에 배려를 했다. 실력이 뛰어난 박찬숙, 유해선 선배들도 제도적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는데 나는 운이 좋았다.”
- 당시 아나운서가 되는 길은 어땠나.
“미모는 뛰어나거나 키가 클 필요가 없었다. 흉하지 않고 참한 인상이면 됐다. 최고의 덕목은 표준어를 구사한다는 것이었고 지적 수준을 많이 봤다. 비율로 따지자면 지적 수준이 먼저고 나머지 얼굴, 미모 등이 부수적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역전이 된 것 같다.”
- 한번도 다른 길을 생각해보지 않았나.
“내 능력에 비해서 과분한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그냥 좋아하는 일이었는데 지금은 미칠 정도로 좋아하는 일이 됐다. 행복하게 일을 하면서 돈까지 받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번에 성균관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통과했다. 뉴스 전달속도를 가지고 연구했다. 이것이 외도라면 외도다.”
- 아나운서의 생명은 목소리인 것 같다. 목 관리는 어떻게 하나.
“술, 담배는 절대 안한다. 규칙적인 생활이 중요하다. 과도한 다이어트도 못한다. 몸이 피곤하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고기와 단백질 위주로 잘 먹는 것이 좋다. 아나운서는 화가 나도 절대 마음대로 소리를 지르면 안된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지만 아침에 녹차를 마시지 않는다.”
- 그동안 가장 힘들었던 점이나 가장 뿌듯했던 점이 있을 것 같은데.
“입사 16년차에 지방발령을 받았다. 1993년 5월부터 청주방송국에서 근무하다 이듬 해 서울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4, 6학년이었는데 1년 반 동안 떨어져 있어 힘들었다. 가장 기뻤던 일은 여성 아나운서로서 93년 10월 최초로 차장 승진, 98년 12월 다시 부장으로 승진 한 것이다. 묘하게도 힘들었던 청주방송국에서 차장으로 승진했다. 여자 아나운서의 선두주자로 부담이 컸지만 행복한 순간이었다.”
- 요즘 수천대 일 경쟁의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 아나운서가 된 후배들이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방송사를 그만두는 경우가 종종 있다.
“프리랜서는 개인의 행복을 추가할 수 있는 권리다. 선택의 문제일 뿐이지 옳고 그름을 따질 문제는 아니다. 방송 환경이 바뀌어서 방송사에서만 활동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엔터테인먼트사에 소속되어 일을 할 수도 있다. 아쉬운 것은 조금 더 다듬어지고 자신의 역량을 키워서 나간다면 좋지 않았을까 한다.”
- 아나운서를 희망하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외모에 신경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청자와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고정관념을 없애고 다양한 독서를 하라. 기술적인 부분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내면의 교양을 많이 쌓았으면 좋겠다.”
박경희 아나운서는요…
1977년 KBS 공채 아나운서 4기로 입사해 올해로 31년간 KBS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는 KBS ‘여자 아나운서의 대모’랍니다. 1992년 한국 방송대상 여자아나운서 부문을 수상했고, 1993년에는 여자 아나운서 중 최초로 차장 승진, 5년 만에 또 부장으로 승진, 한국어연구부장까지 됐습니다. 40대의 여자 아나운서로서는 드물게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아침뉴스 앵커를 맡는 등 현재까지도 방송 활동을 잠시도 쉬어 본 적 없습니다.
이정연 기자 annjoy@donga.com
사진=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