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밥의 나른한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오후 2시. 주부들은 청소를 하며 라디오를 켰고, 직장인들은 상사 눈치를 살피며, 수업 중인 학생들은 선생님 몰래 사탕을 까먹듯 라디오를 들었다. 여공들은 라디오를 들으며 미싱을 돌렸고, 꽉 막힌 시대 도로 위에서 운전기사들은 라디오와 함께 핸들을 돌렸다.
1970년대와 80년대는 라디오의 시대였다. 누구나 라디오를 들었고, 라디오를 아꼈으며,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그리고 이 사람을 사랑했다.
‘오후 2시의 연인’ 김기덕. 그가 진행했던 ‘2시의 데이트’는 당대의 트렌드이자 아이콘이었으며, 그는 1973년부터 1996년까지 만 24년 간 진행한 이 방송 하나로 ‘라디오의 거장’ 반열에 올랐다. ‘단일 프로그램 최장수 제작진행자’로 선정돼 영국 기네스협회로부터 인정서를 받았고, 1997년에는 KBS 라디오가 뽑은 ‘광복 이후 대중문화를 빛낸 문화인 베스트20’에 선정되기도 했다. 1996년에는 ‘골든마우스’ 수상을, 2004년에는 한국방송대상 라디오부문 프로듀서상을 받았다.
전국에 호우주의보가 뿌려진 날 오후 12시. MBC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막 방송을 마친 그를 만났다. 기왕지사 오후 2시였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 여전히 바쁘시죠? 어떻게 지내십니까?
“작년에 회사(MBC)를 정년퇴직하고, 요즘은 프리랜서로 PD 겸 DJ일을 계속하고 있죠. 주식회사 와미디어라고 위성DMD회사 대표이사도 하나 맡고 있고요. 파워리믹스클럽이라는 오디오 채널인데 댄스뮤직전문채널입니다.”
- 원래 방송국엔 아나운서로 입사하셨죠? 그런데 어떻게 라디오 진행을 맡게 되신 겁니까?
“72년부터 78년까지니까 6년 동안 아나운서였죠. 그땐 아나운서들이 뉴스도 하고 라디오 프로그램도 하고 그랬어요. 음악프로라고 해도 전문적인 DJ가 많았던 것도 아니니깐, 아나운서들이 많이 했죠. 거의 전 프로의 60~70% 정도는 그랬을 걸요? 저도 닥치는 대로 했어요. ‘우리는 여고생’ ‘7시의 희망가요’, ‘별이 빛나는 밤에’를 한 적도 있고 … 라디오 웬만한 중요 프로는 많이 했어요.”
- 그러다 아예 PD로 보직을 변경하게 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나운서들은 숙직도 해야 하고, 고유업무들이 있어요. 너무 바쁘니까 … 2시의 데이트는 인기가 있고, 그래서 회사차원에서 FM으로 옮겨라, 이렇게 된 거죠. 78년인가 79년인가에 PD로 옮겼어요.”
- 2시의 데이트는 처음부터 맡으신 거죠?
“아, 그 전엔 ‘FM방송실’이라고 해서 봉봉사중창단의 멤버였던 분이 맡았구요. 그 분이 어디 해외출장을 가게 돼서 대신 들어갔다가 눌러 앉게 된 거죠. 처음엔 ‘FM방송실’이었다가 ‘FM스튜디오’로 바뀌었고 … 2시의 데이트란 타이틀은 75년부터 쓴 겁니다.”
- 팝에 대한 해박한 전문지식은 어떻게 쌓게 되신 건가요?
“뭐, 매일 2시간씩 프로그램을 해야 하니까, 자연히 책도 보게 되고 … 원래 음악을 싫어했던 건 아니었거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팝에 대해 많이 아는 건 아니에요. 또 너무 많이 알면 전문적이 되어서 대중하고 떨어지게 되거든요. 2시의 데이트 할 때도 음악 얘기를 많이 한 것 같지는 않아요. 상식적인 수준에서 얘기하는 거죠.”
- 2시의 데이트는 그럼 PD와 DJ를 겸하신 거네요?
“그렇죠. 청취자들은 제가 PD인 줄 몰랐어요. PD를 겸하다 보니 하고 싶은 걸 다 해봤죠. 라디오에서 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 방향을 여러 가지로 시도했어요. 그런 다양성이 어필이 됐던 것 같고 … 그래서 오래 했겠죠.”
- 지금 생각해도 ‘이건 참 잘 했다’싶은 시도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지금 진행하고 있는 ‘골든디스크’의 음악에세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라디오의 특성이 상상력을 동원하는 거잖아요? 효과음, 시적인 대사 … 소리를 영상화하는 거죠. 한 편의 영화, 풍경, 추억을 그리게 해 주는 게 라디오니까요. 그런 특성을 살린 프로를 많이 했어요. 옛날에 개그맨 박세민 씨와 함께 했던 ‘팝개그드라마’도 있었고, ‘소리나라’라고 해서 소리하고 음악을 접목시킨 것도 있었고 … 아, 토크쇼도 있군요. 80년대 초부터 특정한 주제를 갖고 게스트를 모셔다가 라디오 토크쇼를 했어요. 스타다큐멘터리도 괜찮았던 것 같고 … 이거 제 자랑이 너무 심하네요. 다 빼고 소박하게 써 주세요, 흐흐.”
2시의 데이트는 특히 공개방송이 엄청난 인기였다. 요즘 어린 학생 팬들이 개그콘서트나 음악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방송국 앞에 장사진을 치듯, 그땐 라디오 공개방송이 그 ‘호사’를 누렸다. 2시의 데이트 공개방송은 삼풍백화점 아트홀과 롯데월드 호반무대에서 주로 열렸고, 전국을 떠돌며 인기몰이를 하기도 했다. 공개방송을 운 좋게 구경한 학생들은 다음 날 전교의 영웅이 되었다.
- 2시의 데이트가 그처럼 오랫동안 인기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늘 1, 2위였어요. FM에선 언제나 1위였고. 그런데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회사에서도 신기해하고, 나 자신도 이상했죠. 학부형들한테 항의가 많이 왔었어요. 자녀들이 공부를 안 하고 하도 라디오를 들으니까 그 프로그램 제발 좀 폐지하라고. 지금 40대들 만나 보면 학교 수업 중에 들었다는 사연이 많아요. 그땐 팝송이 하나의 트렌드였던 것 같아요. 요즘 게임이나 영화처럼, 팝송을 많이 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친구들 앞에서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었던 시절이었죠.”
그래서 DJ들이 인기가 높았다. 이종환, 박원웅, 김광환 등의 인기는 요즘 초특급 연예인 저리가라였을 정도. DJ는 인기직종이었고 전국에는 DJ지망생이 줄을 이었다. 꾀죄죄한 음악다방 DJ조차 뭇 여성들의 애정공세에 시달리던, 가히 ‘DJ전성시대’였던 것이다.
- 2시의 데이트를 진행하면서 실수도 좀 있으셨죠?
“말도 못하게 많죠. 게다가 생방송이라 … 그게 라이브죠. 꾸미지 않고, 살아 있는. 동 시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에너지를 주고받는 거잖아요. DJ의 ‘기’와 에너지가 청취자에게 통하는 게 중요해요. 가슴에 박히는 거. 그럼 그 사람이 좋아지는 거죠. 그래서 듣게 되는 거고. 좋아서 들으니까 그 사람이 잘못해도 듣는 거죠. 라디오는 TV와 달리 ‘정’이 있어요. 실수나 인간적인 약점을 봐주는 편이죠. 그래서 TV를 쿨미디어, 라디오는 핫미디어라고 하죠. 물론 요즘은 달라졌어요. 네티즌들이 용서를 잘 안 하죠. 상당히 냉철해졌어요.”
김기덕은 실수가 많은 DJ로도 유명했다. 아니, 그래서 더 사랑받고 유명했다. 가장 흔한 실수는 마이크가 꺼진 줄 모르고 한 소리가 방송으로 나가는 일이었다. 음악이 한창 나가고 있는데 난데없이 “떡국 왔어요!” 소리가 들린 것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정월 초하룻날 음식점 배달원이 주문한 떡국을 들고 스튜디오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호기있게 외친 소리였다.
“지금은 PD가 따로 있고, 작가도 2, 3명씩 붙으니 실수를 하기 힘들죠. 그런데 옛날엔 혼자 다 했거든요. 음악도 자기가 맞추고, 선곡도 하고. 기계 자체도 아날로그였고. 욕하는 건 다반사였죠. 엔지니어한테 ‘야, 이 XX야!’ 한 것도 다 나가고 … 가끔 생방송을 못할 땐 녹음을 하는데, 하다가 잘 안 되니까 혼자서 ‘X팔, 드럽게 안 되네’했던 게 끼어들어간 적 있고. 하여튼 많아요, 하하!”
1983년 정동 MBC스튜디오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 김기덕은 2시의 데이트 생방송을 하고 있었다.
“이어서 들으실 곡은 금세기 최고의 여성 가수, 올리비아 뉴튼 존의 ‘매직’입니다!” 그리고는 음악이 나가는 동안 느긋하게 음반 표지의 여주인공을 감상하고 있었다. 30초쯤 지났을까? 밖에 있던 엔지니어가 유리창을 두드리며 그 노래가 아니라는 사인을 보냈다. 잽싸게 노래 볼륨을 줄이고 마이크를 열었다.
“죄송합니다. 노래가 잘못 나갔네요. 올리비아 뉴튼 존의 진짜 매직입니다.”
사과방송을 하고 다시금 느긋하게 앉아 표지를 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엔지니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전화가 계속 오는데 또 그 노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확인해보니, 사실이었다!
“아휴,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또 실수를 했네요. 이제 정말 확실히 올리비아 뉴튼 존의 매직입니다.”
그러나 잠시 후 5층 사무실에 있던 FM부장이 뛰어올라왔다.
“당신 방송을 어떻게 하는 거야! 사무실로 항의 전화가 계속 오고 있어! 노래 잘못 나간다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쯤 되면 이건 실수가 아니라 사고였다.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한 번 사과방송을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무엇에 씐 모양입니다. 이번에 정말, 분명히 매직입니다.”
잠시 후 다시 스튜디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성난 부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신! 지금 장난치는 거야??!!”
결국 5번 만에 매직이 방송되었다.
2000년 공연을 위해 내한한 올리비아 뉴튼 존이 김기덕의 스튜디오를 찾았다. 이 에피소드를 들은 그녀가 ‘It's true?’하고는 크게 웃었다. 김기덕의 얼굴이 귀까지 빨개지고 말았다.
- 2시의 데이트는 오프닝과 시그널뮤직(영화 엠마뉴엘 주제가)이 굉장히 유명했죠? 특히 그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김기덕입니다! 헤헤헤!’하시던 …
“ ‘안녕하세요’가 세 번 이었죠. 끝에 ‘헤헤헤’ 웃었던 건 한 3, 4년 했나? 그런데 그걸 굉장히 강렬하게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청취자들에게 ‘기’를 전달해야 하니까, 강하게 시작했었죠. 그런 것이 ‘멕혔는’지도 모르고. 전부 제 아이디어였어요. PD가 있었으면 그렇게 못하게 합니다. 그게 미친 놈이지, 우리나라 방송에서. 저야 제 프로였으니까 … 그냥 한 거죠.”
- 당시 팝 음반이나 서적 등을 국내에서 구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미군PX 같은 데서 사기도 하고, 누구 외국 나가는 사람 있으면 부탁하기도 하고 그랬죠. 백판을 주로 틀었어요. 70년대는 거의 다 백판이죠. 원판 하나 나오면 굉장한 거고. 백판 아시죠? 불법으로 찍어낸 음반. 표지가 하얗죠. 계속 찍어내면 음질이 나쁜데, 처음에 나오는 건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그런 걸 대주는 전문업자들이 있었죠. 국내에 라이센스 음반이 나온 건 80년대 이후에요. 지구레코드니 하는 곳들에서 더러 나왔는데, 라이센스 음질도 그렇게 좋진 않았어요.”
김기덕의 프로필을 보면 ‘가장 존경하는 인물 : 크리스티나 무르티’ ‘감명 깊게 읽은 책 : 자기로부터의 혁명’ ‘동양방송 주최 대학방송경연대회 ’계룡산 사이비종교‘로 우수상 수상’ 등이 눈에 띤다. 어딘지 냄새가 난다.
- 혹시 ‘도’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MBC입사할 때부터 지금까지 제 이력서를 보시면 한결같이 ‘장래희망 : 도사’입니다. 다들 웃으시는데 옛날부터 그랬어요. 80년대 초부터 우리나라 단(丹), 명상, 도에 관심이 많았죠. 신사동 송창식 씨 집에서 김도향 씨 등이랑 같이 모임을 갖기도 하고 그랬어요. 지금도 화두인데 … 인생의 허무, 고독, 이런 것들이 꾸준히 학생 시절부터 따라다닌 거죠. 2시의 데이트 할 때도 매일 이런 얘기만 했어요. 지금 하면 미친 놈 됐지. 그땐 괜찮았어요. 에너지를 실어서 하니깐. 팝송하고 모아서 ‘무당끼’ 있게 말이죠.”
지금도 그는 일주일에 세 번씩 ‘해밝달 명상센터’에 나가 강의를 듣고 명상에 빠진다. 교육과 성격, 환경으로 가려진 ‘참나’를 찾기 위한 작업이다. 도를 말할 때의 그는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다.
- 형님도 유명한 성우시죠? 목소리 좋은 건 유전인가요?
“아버님이 시조 선생님이셨어요. 어려서부터 늘 시조를 가르치셨죠. 사랑방에는 늘 아버지한테 시조를 배우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도 지금도 시조를 해요. 어려서부터 하도 들어서. 유전이라면 아버지 목소리겠죠. 지금도 화를 내거나 하면 아버지가 우리에게 화내실 때 목소리가 나와요, 하하!”
- 30년이 넘도록 생방송을 하시려면 자기 관리가 철저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술은 좀 하십니까?
“술 먹으면 목소리가 이튿날 더 좋아져요. 몸은 피곤한테 목소리는 그래요. 이상하죠? 운동은 열심히 하는 편이죠. 전엔 말을 탔는데 요즘엔 허리가 안 좋아져서, 골프 좀 합니다. (얼마나 치시나요?) 뭐, 잘 치는 편이에요. (싱글이신가 보죠?) 그 정도는 아니고, 80대 칩니다.”
- 사람들이 ‘김기덕은 팝송만 들을 것이다’라는 선입견이 있는데요?
“저는요, 지금까지 집에 라디오 하나가 없고, 오디오 하나가 없어요. TV는 있지만 한 달에 한 두 번 보나? 거의 안 봐요. 참 특이한 놈이죠. 신문도 잘 안 봐요.”
- 노래방은 가십니까?
“가긴 가는데 노래는 안 불러요. 하라고 막 그러는데 안 하죠. 기껏해야 ‘러브 미 텐더’ 정도 … 아니면 뽕짝이죠 뭐.”
김기덕은 방송 중 대본이란 걸 쥐어본 적이 없다. 작가가 있어도 음악에 대한 자료나 뽑아주는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청취자 사연을 읽을 때 곧잘 더듬는다. 뭔가를 보면서 읽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다.
“그래서 매일 욕을 먹죠. 아나운서를 했다는 사람이 그렇게 못 읽냐고.”
- 1남 1녀를 두셨죠? 자녀들이 아버지 방송을 듣습니까?
“딸애가 아주 강력한 모니터에요. 지금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인터넷으로 듣고는 매일 전화하죠. 아주 냉철해요. ‘그걸 방송이라고 하냐’고 하기도 하죠.”
- 평소 성품이 아주 온화하신데, 방송할 때만은 굉장히 무섭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저요? 저는요, 성질이 굉장히 더럽습니다. 일에 대해서 만큼은요. 그렇지 않으면 일이 안 돼요. 악명이 높죠. 작가들도 저를 싫어합니다. 일에 대해서는 절대 용서 안 해요. 그게 프로죠. 대신 일은 배워요. 일은 배우는데, 그래도 싫어하죠. 가서 욕 많이 하죠, 흐흐흐. 할 수 없는 거지 뭐.”
- ‘2시의 데이트’ 하면 팝송 무가지였던 ‘POP PM 2:00’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으신데요.
“팝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월간팝송 같은 잡지가 있긴 했지만 너무 전문적이고. 스폰서를 잡아서 격주 간, 한 달에 두 번씩 발행했어요. 그게 십 몇 년 나왔죠, 아마? 32쪽짜리였는데, 원고·편집·교정 혼자서 다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건 정말 대단한 거 같아. 어떻게 했을까 … 싶죠.”
당시 ‘POP PM 2:00’는 팝 정보에 목마른 이 땅의 청춘들을 위한 ‘청량음료’와 같은 책이었다. 무가지로 인켈, 태광, 제과점 등에서 배포를 했고, 이 책을 받기 위해 학생들은 기꺼이 ‘자율학습’마저 포기하고 배포처로 달려가곤 했다.
김기덕의 인생에서 최악의 시기는 1994년도였다. PD들이 가수와 매니저들로부터 홍보비 명목으로 거액을 받은 사건이 터졌을 때 그의 이름이 연루되었다. 이로 인해 분신과도 같았던 2시의 데이트와도 결별해야 했다. 무혐의로 판정이 났지만, 상처는 깊고 오래 남았다.
“억울하다기보다는, 내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죠. 무혐의 판정을 받고 다시 2시의 데이트로 복귀했는데, 그게 인생 일대의 실수였어요. 무엇보다 팬들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내 자신도 주눅이 들고 … 회사의 명령이긴 했지만 끝까지 고사를 했어야 했는데 ….”
끝으로 그는 ‘우리나라에도 전문적인 라디오 스타가 많이 나왔으면’하는 바람을 피력했다. 이미 TV 등을 통해 유명해진 사람이 라디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목소리로만 스타가 되는 후배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얘기였다.
청취자들의 ‘상상을 깨기 싫다’는 이유 하나로 무수한 CF와 MC 유혹도 뿌리친 채, 꿋꿋하게 스튜디오를 지킨 영원한 ‘2시의 연인’ 김기덕.
신인가수들에게 “너, 2시의 데이트 나갈래? TV쇼 나갈래?”하면 열의 아홉은 ‘2시의 데이트!’를 외치던 시대는 갔지만, 그는 오늘도 여전히 오전 11시면 씩씩하게 마이크 앞에 앉는다.
● 김기덕은?
1948 충남 공주 태생
1972 MBC 아나운서입사
1994 MBC라디오국 국장급 제작위원
2007 MBC 정년퇴임
1996 골든마우스 수상
2003 방송30주년 기념음악회
2004 한국방송대상 라디오 프로듀서상 수상
1973∼1996 MBC FM 2시의 데이트 진행
1997 MBC FM 별이 빛나는 밤에 진행
1997∼ MBC FM 골든디스크 진행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