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9년만에 또 부활한 ‘공포 아이콘’

  • 입력 2008년 8월 12일 03시 01분


《1977년부터 1989년까지 573화가 방송된 TV 시리즈 ‘전설의 고향’.

특히 여름밤에 방영된 ‘전설의 고향-납량특집’은 삼복더위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봐야 할 만큼 무시무시한, 한국의 대표적인 공포 아이콘이었다.

1996년 다시 방송을 시작한 전설의 고향은 1999년 막을 내렸고, 9년 만인 이달 6일 KBS 2TV를 통해 또다시 부활했다.》

시리즈 첫 편은 한국 공포물의 최고 브랜드라고 할 수 있는 ‘구미호’. 현란한 컴퓨터그래픽(CG) 기술을 통해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구미호는 ‘블레이드’(구미호의 문신), ‘다빈치 코드’(남자들만의 비밀모임), ‘여고괴담’(컷을 나눠 급작스레 다가오는 방식), ‘주온’(다락방에서 얼굴을 쓱 내미는 설정), ‘터미네이터 2’(손톱이 흉기로 변해 쭉 뻗어 나가는 모습) 등 국내외 유명 영화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한 듯한 장면들로 가득했다.

결과는? 아쉽게도 용두사미요, ‘안습’(안구에 습기가 찰 정도로 민망하다는 뜻을 가진 인터넷 은어)이었다. 2008년판 ‘디지털 구미호’는 기존의 구미호가 가진 어떤 조건들이 시청자의 근원적 공포를 유발했는지에 관한 기초적인 연구나 인식도 없어 보였다.

현대판 구미호가 공포 조성에 실패한 이유를 살펴본다.

○ 구미호의 카리스마=구미호에 뿌리내리고 있는 핵심 가치란 무엇인가? 한(恨)의 정서다. 구미호는 인간이 되고자 무려 1000년을 기다리지만, 결국 ‘D데이’를 하루 앞두고 실패하는 한 서린 여우다.

현대판 구미호(사진 ①)를 보자. 단아하게 쪽을 찐 데다 코팅을 한 듯 윤기 나는 머리, 네일아트를 한 듯 백옥 빛 손톱에, 파운데이션으로 다져진 피부, 어깨선이 훤히 드러나는 한복 원피스 차림이다. 섹시한 구미호도 좋지만 근본적인 문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전혀 무섭지 않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도무지 짐승(여우)이란 존재감이 느껴지질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구미호를 보고 오금이 저린 사람이 있을까? 외려 “아가씨, 시간 있으면 커피나 한 잔…” 하고 수작을 걸고 싶어진다.

탤런트 송윤아가 구미호로 나왔던 1997년판 구미호(사진 ②)를 보자. 지금 기준에선 조악한 분장기술이지만, 털인지 머린지 헷갈리는 괴수형 헤어스타일과 붉은 조명만으로도 공포감이 충분히 조성된다. 여기에 피눈물 살짝 흘려주면 보는 이의 심장은 꽁꽁 얼어버린다.

○ 구미호의 꼬리=현대판 구미호는 CG를 통해 처음으로 9개의 꼬리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구미호(九尾狐)’라는 이름의 본질에 충실한 것. 하지만 클라이맥스 지점에서 꼬리를 펼친 구미호의 모습(사진 ③)은 무슨 어린이대공원에 사는 공작새나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자체 발광(發光)’ 세르게이가 연상될 만큼 우스꽝스러워 긴장이 확 풀린다. CG라는 기술적 진보(비주얼)보다 중요한 건 이야기의 설득력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대목.

○ 구미호의 공격 방식=공포영화에서 미사일보다 총이 더 무섭고, 총보다 칼(혹은 전기톱)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까닭은 뭘까? 바로 직접성과 근접성 때문이다. 멀리서 방아쇠를 당기면 끝나는 총과 달리, 칼과 같은 ‘직접적인 무기’는 면전에서 사용되므로 관객의 체감공포가 극대화된다.

구미호가 진정 무서운 것도 이런 이유. 구미호는 눈앞에 나타나 손톱으로 ‘손수’ 상대의 간을 파먹는다. 상대의 목을 직접 깨무는 드라큘라의 행위가 오싹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마찬가지. 하지만 현대판 구미호는 손톱을 창처럼 길게 변형시켜 먼 거리에서 상대를 제압함(사진 ④)으로써 시청자의 공포 체감도를 낮춘다. 직접 심장을 파내는 대신, 그저 상대의 심장을 쥐어짜는 모양을 취하는 구미호의 시뮬레이션 액션(사진 ⑤)도 ‘접촉이 주는 공포’를 모르는 순진한 접근. 구미호의 이런 행위에 나쁜 놈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모습은, “빵야” 하고 장난감 총을 쏴대면 “으악” 하고 죽는 시늉을 하는 취학 전 아이들의 놀이를 연상시킨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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