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찢어질 듯한 함성 소리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아래, 멋지게 차려입고 스타와 동행하는 이들은 만년 조연이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한 달 80∼100만 원 수입이 전부. 수상의 영광도 없고, 대중의 뇌리에 이름 한 자 남기지 못 한다. 바로 댄서.
늘 스타의 뒤에 있어 ‘백(Back)댄서’라고 불리는 이들이지만 ‘월드스타’ 비나 ‘아시아의 별’ 보아가 혼자 무대에 올랐다면 그만큼 빛날 수 있을까.
JYP엔터테인먼트 소속 박남용 팀장은 가수 싸이를 유명하게 만든 ‘새’ 춤과 박지윤의 유명한 ‘성인식’ 춤을 만든 주인공이다. 최근에는 비의 ‘레이니즘’ 안무에 참여했고, 2PM의 아크로바틱 안무를 완성했다.
춤으로 살아온 인생 12년. 박 팀장은 “바보 같이 한 우물만 파다가 여기까지 왔다”며 웃었다. 그는 1996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언타이틀 댄서로 활동을 하는 친구를 따라 우연히 사무실을 갔다가 춤에 빠지게 됐다.
아무것도 몰랐던 18세. 환호성이 터지는 무대 위에서 더할 나위 없는 쾌감을 느꼈다. 결국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 춤 연습에 몰두했다.
“학생이었는데 돈이 어디 있겠어요. 아르바이트해서 10만 원을 모았죠. 그리고는 전신 거울이 있는 에어로빅실을 빌려서 날이 새는 줄 모르고 춤을 췄어요.”
춤의 매력에 빠진 박 팀장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박진영의 안무팀 팀매니아에 소속돼 본격적인 댄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음악프로그램을 비롯해 라디오 공개방송 등 하루에 4∼5개 스케줄을 소화하며 눈 코 뜰 새 없는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1998년 IMF가 터진 후 댄서들의 일당은 4만5000원으로 동결됐고, MP3가 발달하고 가요계에 불황이 지속되면서 설 무대도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한 팀에 70명 정도 있었지만 지금은 6명 정도예요. 이 일로 먹고 살기 힘드니까 투 잡을 하는 친구도 많죠. 대접 못 받고 생활고에 시달리고. 대부분 그렇죠.”
“아무리 작은 일이라고 해도 10년을 하면 기반이 잡히잖아요. 저희는 10년을 투자하면 이 바닥을 떠나야 해요. 사회생활 일찍 시작했는데 다시 다른 생활에 뛰어들어야 하는 거죠.”
이처럼 열악한 상황과 생활고, 그리고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서도 춤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대 올라가기 전 그 순간이 너무 좋아요. 동생들과 얼마 전에 술 먹으면서 물어봤어요. 지금 행복하냐고. 다 행복하대요. 그런데 또 그래서 불행하대요. 이 행복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댄서들의 운명이 그래요.”
홍재현 기자 hong927@donga.com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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