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완벽한 킬러는 없다”

  • 입력 2008년 12월 2일 02시 51분


■ 비고 모텐슨 ‘이스턴 프라미스’서 열연

폭력과 구원사이 내면 연기 돋보여

‘반지의 제왕’ 아라곤왕자 역과 대조

대중목욕탕에서 벌거벗은 채 고개를 숙인 한 남자에게 칼을 든 두 괴한이 다가든다. 사투를 벌인 남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빠져나온다. 칼에 베인 등과 배에서는 피가 흐른다.

11일 개봉하는 영화 ‘이스턴 프라미스(Eastern Promises)’의 도입부는 핏빛으로 가득하다. 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폭력의 역사’ ‘크래시’ 등에서 폭력을 통해 일상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갈등과 인간 내면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줬다. 이 작품은 지난해 미국에서 개봉된 뒤 ‘폭력의 역사’ 후속편으로 불리기도 했다. 두 작품 모두 비고 모텐슨이 주연을 한 데다 불안한 가족과 폭력성 등의 공통점 때문이다.

영국 런던의 한 병원에서 조산원으로 근무하는 애나(나오미 와츠)는 14세 러시아 소녀가 아이를 낳고 죽자 소녀의 연고지를 찾는다. 소녀가 남긴 일기장에서 발견한 레스토랑에 찾아가지만 그곳은 러시아 범죄조직의 소굴이다. 소녀의 죽음에 조직의 보스가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 애나는 위험에 빠진다. 애나에게 호감을 갖게 된 조직원 니콜라이(비고 모텐슨)는 조직과 애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고군분투한다.

크로넨버그 감독은 폭력의 극한으로 치달았던 ‘폭력의 역사’와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결말에서 그 수위를 낮췄다. 잔학하기 이를 데 없던 보스의 아들 키릴(뱅상 카셀)이 아기를 죽여 증거를 없애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갈등하는 모습과 이어지는 결말은 폭력의 극대치를 보여준 뒤 감정의 정화를 관객의 몫으로 맡기던 이전 작품들과는 다르다. 그 대신 동방의 약속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구원이라는 종교적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한다.

이 작품을 빛낸 것은 비고 모텐슨의 열연이다. 그는 조직의 배신과 자신의 임무, 인간이 갖춰야 할 덕목 사이에서 고민하면서도 러시아 마피아 일원으로서 차갑고 잔혹한 이미지를 잃지 않는다. 수개월간 현지에서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교습을 받았다는 그의 러시아어 악센트 섞인 영어 발음은 차가운 킬러의 이미지에 사실성을 더한다. ‘반지의 제왕’에서 보여준 아라곤 왕자의 모습보다 훨씬 적합한 옷을 찾아 입은 듯하다.

이 작품은 미국 평론가협회가 선정한 2007년 최고의 영화 10편에 포함됐다. 신선도로 작품성을 평가하는 미국의 영화평론 사이트인 ‘로튼토마토닷컴’은 신선도 88%로 비교적 높은 점수를 줬다. 18세 이상.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주목! 이 장면▼

목욕탕서 알몸 사투… “생존 위한 인간의 몸부림”

대중목욕탕에서 알몸인 니콜라이가 조직의 배신으로 괴한 2명과 사투를 벌이는 장면. 다짜고짜 흉기를 휘두르는 이들을 피해 다니며 니콜라이는 자기 방어를 한다. 목욕탕에서 한데 엉켜 뒹구는 세 남자의 모습은 멋을 부린 장면이 아니다. 머리를 잡고 얼굴을 짓누르는 이 싸움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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