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2008 오감자극! 바로 이 영화

  • 입력 2008년 12월 16일 02시 59분


《올해에도 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내 심장 속에 살아남은 영화는 많지 않다. 이런저런 영화상 시상식이 열리는 이맘때면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같은 뻔한 상들 말고 내 취향에 따라 내 맘대로 주는 시상식을 열어봤으면…’ 하는 상상을 한다. 올해 내가 본 영화 중 나의 오감(五感)을 제대로 자극했던 영화를 골라 부문별로 상을 줘봤다.》

삽질하는 공효진… ‘간지 좔좔 흐르는’ 흡혈귀

세파 잊게해준 배우들에 박수를

[최고의 굴욕]

영화 ‘미스 홍당무’가 차지했다.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안면홍조증에 걸린 전교 ‘왕따’ 영어교사 양미숙(공효진). 그녀는 10년을 짝사랑해온 남자에게 퇴짜를 맞은 뒤 “예쁜 것들은 다 묻어버려야 돼”라며 교정에 삽질을 일삼는다. 땅을 퍼내고 궁상맞게 쪼그려 앉는 미숙(사진①)은 지나가던 학생과 대화한다.

“그래, 나 영어 못한다.”(미숙) “영어도 못하면서 수업까지 대충한다고 애들이 다 싫어해요.”(학생)

신분을 감추고 닭발을 뜯어먹고, 고교시절 졸업사진에 얼굴을 내밀기 위해 안간힘으로 뛰어오르는 모습은 최고의 굴욕 장면. 굴욕을 자처한 용감한 배우 공효진에게 박수를!

[최고의 샤방샤방]

미국 할리우드산 10대용 뱀파이어 영화 ‘트와일라잇’. 세상에나, 이렇게 ‘간지 좔좔 흐르는’(‘잘생기고 멋진’이란 뜻의 10대들의 은어) 흡혈귀(사진②)를 본 적 있는지. 게다가 이놈의 흡혈귀는 햇빛에 노출되면 홀라당 불타버리기는커녕 온몸이 진주가루로 코팅된 것처럼 ‘샤방샤방’(‘반짝반짝 빛나는’이란 뜻의 속어)해지기까지 하니…. 남자인 나라도 순결한 목을 내주며 범해지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최고의 대략난감]

단연 영화 ‘경축! 우리사랑’. 억척스러운 하숙집 아줌마 봉순(김해숙)이 뒤쫓아 오는 딸을 피해 전력질주로 도망가는 순간이다(사진③). 왜냐고? 이 아줌마는 딸의 애인이자 하숙생인 한 청년의 아이를 가진 상태. 기가 막혀하는 딸은 “왜 도망가? 유전자 감식 알지? 그 애가 오빠 애란 증거가 없잖아”라며 엄마를 쫓고, 엄마인 봉순은 “맞다니까. 나 꼭 낳아 기를 거야”라며 기를 쓰고 뛴다. 아, 시쳇말로 ‘콩가루 집안’의 이런 황당무계한 모습을 ‘아줌마의 주체적인 삶’이란 관점에서 논쟁적이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오점균 감독의 이야기 솜씨에 감탄하다.

[최고의 등]

혹자는 영화 ‘미인도’ 포스터에 등장한 배우 김민선의 등을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영화 ‘원티드’에 나온 섹시스타 앤젤리나 졸리의 등짝을 단연 ‘올해의 등’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창백하고 내성적인 김민선의 등에 비해(아마도 이는 영화 콘셉트에 맞추기 위해서였으리라) 광파오븐에서 갓 구워져 나온 닭날개처럼 촉촉한 윤기와 체온과 욕망과 유혹의 에너지가 배어나오는 졸리의 등은 가일층 매혹적. 게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남성의 시선을 즐기는 듯 살짝 돌아보면서 여운을 선물해주는 센스.

[최고의 발]

이준익 감독의 최신작 ‘님은 먼 곳에’에서 노출된 여배우 수애의 발목 접은 흰 양말(사진④). 때는 1971년, 군대 간 남편을 면회 온 그녀는 도통 정을 주지 않는 남편에게 마련해간 도시락을 내밀고는 바닥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240mm 남짓 돼 보이는 그녀의 새하얀 발, 거기엔 방 안의 어색한 공기 속에서도 때묻지 않고 건강하게 빛나는 여심(女心)이 응축돼 있다.

[최고의 이미지]

영화 ‘원티드’에서 초능력을 가진 정부요원이 고층빌딩의 유리를 깨고 나오면서 괴력을 발휘하는 순간. 충격적이다 못해 치명적인 이미지다. 러시아 감독인 티무르 베크맘베토프를 왜 할리우드가 ‘수입’해 갔는지를 짐작게 하는 올해 최고의 장면. 산산이 부서진 유리가 얼굴에 깨알같이 달라붙으면서 그 자체로 기괴한 캐릭터를 형성해가는 모습(사진⑤)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부활을 목격하는 듯하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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