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김지운 감독

  • 입력 2008년 12월 20일 02시 58분


올 한국영화 최고히트작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김지운 감독

감독-CEO 역할은 유연하게 방향 잡아주는 것

《영화감독이 아니라 노련한 기업 경영자나 인사관리를 전공한 경영학자와 대화를 나눈 기분이랄까. 올해 한국 영화계 최고의 히트작인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사진)의 연출자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김지운 감독을 만난 후 든 생각이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17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사무실에서 김지운 감독을 만나 ‘리더로서의 영화감독’이 기업 리더들에게 주는 시사점을 들어 봤다. 영화감독은 수많은 배우와 스태프를 지휘해 영화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리더의 통솔력과 역량에 따라 조직의 분위기와 최종 결과물의 품질이 달라진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김 감독의 인터뷰 전문은 DBR 24호(2009년 1월 1일자)에 실린다.》

“감독은 공동의 목표-비전 제시하며 ‘판타지’ 구현 집중

권한 폭넓게 이양, 자발적으로 일하는 환경 만들어야

결국 리더가 넉넉해야 조직분위기 살고 결과도 좋죠”

―2006년에 펴내신 에세이 ‘숏컷’에서 영화감독이 되기 전에는 캠코더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인이 ‘기계치’란 말씀도 하셨고요. 기능적인 지식을 몰라도 좋은 영화를 만드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영화는 미학이 기술보다 우선시되는 분야입니다.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판타지’이고 기술은 판타지를 구현하기 위한 도구이지요. 저는 감독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영화의 핵심인 판타지를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감독은 미학적인 면을 맡고 기술적인 부분은 전문가들이 실행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지요.”

―전문가에게 권한을 이양하신다는 점은 비즈니스 분야에도 시사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업의 CEO도 모든 분야를 완벽하게 다 아우르는 지식을 가지기가 어렵거든요. 이런 점에서 바람직한 리더십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요.

“영화감독은 가장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직업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저는 리더가 전문가들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들의 영역을 넘거나, 간섭하거나, 아는 체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캠코더도 다룰 줄 몰랐다고 말씀드렸지요?(웃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를 그들에게 전달해 성과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저는 ‘나는 잘 모르겠는데, 이러저러하게 하고 싶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렇게 하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유연하고 자유로운 사고로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창작 의욕도 증폭되고 고취되지요.

기업의 CEO나 리더라면 ‘우리가 이런 기업이 되었으면 한다’라거나 ‘이런 상품을 만들고 싶다’고 얘기하고 구체적인 방법은 전문가에게 결정하도록 할 수 있겠지요. 저는 리더가 아는 게 많아 얘기를 많이 할 수 있어도 좋겠지만, 각 담당자가 자발적으로 신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영화감독은 개성이 매우 강한 배우와 스태프들을 하나로 잘 묶어내야 하는 어려운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어려운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비결을 말씀해 주십시오.

“공동의 목표와 비전을 제시하고 사심 없는 입장과 태도를 보여 주려고 노력한 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배우가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운 연기를 할 때 감독은 그 사람이 ‘내가 왜 이렇게 이유 없이 고통을 치러야 하는가’란 생각을 하지 않고 ‘이것을 이겨내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좋은 영화를 만들자는 목표와 비전을 명료하게 인식시켜야 한다는 말이지요. 배우가 해당 장면의 목표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비전에 공감하면 순간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참아내게 됩니다.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 씨가 비 오는 날 와이셔츠 하나만 입고 흙더미 속에 들어가는 장면을 찍은 것이 11월쯤이었습니다. 이때가 사실 일 년 중 체감온도가 가장 낮지요. 한겨울에는 추위에 몸이 적응돼 오히려 덜 춥게 느끼니까요. 주변에 난방 시설이 하나도 없는 청평에서 촬영해 현장 사정이 아주 열악했습니다.

이 장면은 주인공이 복수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심리를 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병헌 씨에게 ‘육체의 고통스러움이 극한으로 치달리는 것과 비례해 복수심이 높아지는 것을 표현하자’고 말했습니다. 장면의 목적과 비전을 알려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병헌 씨는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연기를 해 냈습니다.”

―영화를 촬영하다 보면 배우나 스태프가 감독의 지시에 반론을 내거나 자신의 의견이 더 낫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때는 리더가 유연한 사고를 해야 합니다. 목표점에 관한 공감은 이뤄졌지만 리더와 구성원 간의 실행 방법이 다를 때, 즉 ‘어떻게’에 관한 실행 방안의 차이가 확연하게 날 때는 우선 끊임없이 토론하고 설득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일방적으로 명령만 하면 구성원의 사기가 떨어집니다.

그래도 그 간극이 좁혀지지 않으면 저는 제가 생각하는 버전과 배우들이 생각하는 버전 두 가지 모두를 촬영해 둡니다. 나중에 그 두 가지를 다 함께 리뷰하고 최종적으로 더 좋은 것을 함께 고릅니다. 영화도 결국 사람이 만드는 것입니다. 제 생각이 옳을 때도 있고 배우 생각이 더 옳을 때도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보면 분명 더 좋은 것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무작정 리더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는 유연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기업에도 이런 식의 유연한 시스템이 작동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업 인재 경영에서의 유연성은 다른 말로 풀어 보면 ‘지성적 경영’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성은 결국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 보는 것, 남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것만 고집하는 것은 반(反)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리더의 역할은 ‘운을 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독과 기업의 리더는 나아가야 할 방향에 ‘첫 운’을 떼 주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다른 구성원들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리더는 이 가운데 최종적으로 필요한 것을 취사선택해 ‘요리’를 하는 사람이지요.”

김 감독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는 요청에 “지식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저는 촬영을 하기 전에 연기자들에게 먼저 질문을 던집니다. ‘시나리오를 읽고 해석해 봤나?’ 그렇다고 대답하면 연기를 하게 합니다. 그런데 연기가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는 ‘당신이 진정으로 해석을 안 해서 그렇다’라고 말합니다. 실천이 없는 삶은 이루어질 수 없어 슬픈 꿈과 같습니다.”

○ 김지운 감독은…

한국영화 점유율이 2001년 이후 최악의 상황을 맞은 2008년 관객 688만 명이란 최고의 성공을 거둔 영화 ‘놈놈놈’을 연출했다. 이 영화로 청룡영화상 감독상, 영화감독들이 뽑은 ‘디렉터스 컷 어워드’ 감독상, 시체스 국제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하와이국제영화제 매버릭상 등을 받았다.

서울예대 연극과를 자퇴하고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10년 가까이 백수 생활을 한 그는 라면집 아주머니가 쟁반 대신 깔아준 ‘씨네21 시나리오 공모전’ 기사를 보고 1주일 만에 시나리오 한 편을 써내 당선됐다. 그 시나리오가 바로 코믹과 공포를 결합한 ‘조용한 가족’이었다.

‘조용한 가족’(1998년) ‘반칙왕’(2000년) ‘장화, 홍련’(2003년) ‘달콤한 인생’(2005년) ‘놈놈놈’(2008년) 등 블랙코미디부터 공포, 누아르, 웨스턴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장편영화를 모두 성공시켰다. 그는 또 평균을 뛰어넘는 흥행 성적으로 충무로 제작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조한상 KT 미래사회연구소 선임연구원 traces@kt.com

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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