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빈의 언제나 영화처럼] 러브레터

  • 입력 2008년 12월 25일 07시 45분


얼마 전 경찰로 근무하는 지인들과 점심을 먹다 문득 초등학교 때 짝꿍이 생각났습니다.

“혹시 *** 아세요? 경찰대학 갔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아나운서의 첫사랑 찾기’ 시작!

그 분들은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고, 잠시 후 제 손엔 전화번호가 쥐어졌죠.

사실 제 첫사랑은 영화 ‘러브레터’처럼 애절하거나 아름답진 않았습니다. 어릴 때 안경을 썼던 저는 절대 청순가련하지 않았고, 그 친구도 온갖 만행(?)을 저지르던 개구쟁이였답니다. 우리는 학급 임원을 함께 했고, 키가 비슷해 짝꿍도 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반에 배정된 것을 이상하리만치 서운해 하는 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속 남자 이츠키처럼, 그 아이가 신경 쓰였고 마주치면 피하곤 했지요. 백일장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도 어머니들이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말 한 마디 걸지 못했습니다.

사춘기가 좀 일찍 찾아왔던 걸까요. 그저 서툴고, 설레기만 했던 시간들! 아마 두 이츠키가 도서관에서, 자전거 정류장에서, 말없이 서로를 지켜보던 마음도 그런 것이었을까요.

‘러브레터’의 계절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겨울인 걸 기억하시나요? 시간 속에 가려졌던 첫사랑을 찾는다는 건 눈처럼 순수했던 시간을 찾는 작업과 같아요. 어른이 되고 머리가 커진 후에는 느낄 수 없는 순백의 감정.

공부를 잘한다는 그 친구 덕분에 저도 열심히 살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면 만날 수 있을까 싶었죠. 그런데 그 친구가 경찰대에 갔다는 얘기에 살짝 실망도 했습니다. 100미터를 20초에 달리는 저로서는, 경찰대는 무리였거든요.

남자 ‘이츠키’는 여자 ‘이츠키’에게 왜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을까요? 순수한 감정에 때를 묻히고 싶지 않아서 기억 속 어린 아이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요?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것처럼.

영화 말미에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가 자신에게 건넸던 책 뒤에 자신의 얼굴을 그린 걸 발견합니다. 제게도 그 친구한테 빌리고 미처 돌려주지 못한 책 한 권이 있습니다.

‘러브레터’에선 주인공들이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죠? 중학생이 그리 어려운 책을 읽다니 비현실적이지 않나요? 저는 그 책이 ‘몽실언니’라는 ‘전설’이 있네요. 아, 영화와 현실의 괴리란!

그의 연락처를 받은 전 어떻게 했을까요? 그 친구가 결혼해 아이까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차마 연락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결혼하지 않았어도 마찬가지였겠죠.

혼자만의 짝사랑이 틀림없는데 민망하고, 무엇보다 어린 시절 순수했던 감정을 간직하고 싶었으니까요.

오늘 밤, 창 밖에는 ‘러브레터’처럼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네요. 이젠 유부남이 된, 기억 속 어린 ‘이츠키’에게 묻고 싶습니다.

“오겡끼 데스까!”

조수빈

꿈많은 KBS 아나운서.

영화 프로 진행 이후 영화를 보고 삶을 돌아보는 게 너무 좋아 끄적이기 시작함. 영화에 중독된 지금, 영화 음악 프로그램이나 영화 관련 일에 참여해보고 싶은 욕심쟁이, 우후훗!

[조수빈의 언제나 영화처럼]러브 액츄얼리

[조수빈의 언제나 영화처럼]집으로

[조수빈의 언제나 영화처럼]봄날은 간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