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TV 드라마는 통속극(通俗劇)이 문을 열었다. 지난해부터 인기를 끈 대표적인 통속극인 SBS ‘아내의 유혹’과 MBC ‘에덴의 동쪽’은 평균 시청률이 30%를 넘나든다. KBS1 일일드라마 ‘너는 내 운명’은 마지막 한 주 평균 시청률 42.7%를 올리며 9일 종영했다. “아침드라마의 통속극 회귀”라는 평가에도 SBS ‘순결한 당신’은 15%대를 기록하며 상승 곡선을 그렸다.
통속극은 ‘비전문적이고 대체로 저속하며 대중에게 쉽게 통하는 일반적 풍속의 내용을 다룬 연극이나 드라마’(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를 말한다. 전문 지식이 없어도 받아들이기 쉽고, 인간 본연의 성정(性情)과 맞닿아 있다는 풀이다. 이 때문에 설정이나 전개가 진부하다는 비판도 뒤따른다.
하지만 통속 드라마는 언제나 이어지고 있다. 시청자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시청률을 몰아주기 때문이다. 예술적 가치를 논하는 날선 이성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시청자를 사로잡는다는 뜻이다.
동아일보 방송팀은 ‘AGB 닐슨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1주 동안 4개 드라마의 ‘분당 최고시청률’ 장면을 분석했다.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장면에는 그 어떤 통속의 코드가 담겨 있다. 과연 통속극은, 왜 통(通)하는 것일까.
○ 클로즈업, 그곳에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12, 13일 방영된 ‘에덴의 동쪽’에서 분당 최고시청률은 13일 40회 방영을 시작한 뒤 23분대 장면(33.2%)이다. 이 드라마의 핵심인 출생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의심에 찬 오 여사(나현희)가 레베카(신은정)를 찾아가 자신의 아이가 뒤바뀌었음을 확인하는 것. 오열하는 오 여사를 향해 레베카는 “모든 건 남편 신태환(조민기) 탓이니 그에게 복수하라”고 종용한다.
아침드라마 ‘순결한 당신’을 보자. 아직 초반인 이 드라마가 한 주(5∼9일)간 분당 최고시청률 16.9%를 기록한 장면은 6일(14회) 9분대였다. 남녀 문제로 갈등하는 딸 단비(임예원)의 뺨을 무심결에 때려 버린 서유일(독고영재). 단비의 연인이 원수 집안임을 차마 말할 순 없고. 술집에서 동생 유희(이상아)를 만나 회환에 사로잡혀 눈물을 머금는다.
서로 다른 드라마지만 두 장면은 많은 것을 공유한다. 먼저 ‘갈등이 표출되는’ 장면이라는 점. 기존 설정이 꼬이거나 풀리거나,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고조된다. 이런 장면에 유독 클로즈업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의 희로애락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되는 건 ‘얼굴’이다. 또한 이런 갈등이 인간관계의 기본 고리인 ‘가족’ 관계로 말미암은 것도 비슷하다. 드라마 속이건 현실이건, 시청자의 마음을 흔드는 가장 친밀한 관계는 가족이다.
그리고 빠져선 안 되는 결정적 변수, ‘눈물’이 등장한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 ‘시학’에서 “예술의 목적은 비극이 전해 주는 카타르시스에 있다”고 말했다. 비극의 눈물이 곧 카타르시스의 결정체라는 것이다. 통속극도 마찬가지다. 갈등을 터뜨리고 감정의 전이를 이끌어 내는 건 기쁨보다 슬픔, 웃음보다 눈물이 앞선다. 문화평론가 이영미 씨는 “드라마를 통해 인식적 깨달음을 얻기보다 감정을 발산하고 욕망을 자극하는 본질적 인간의 정서에 시청자들도 반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 둘 다 이 대목 하나만 봐도 극의 전체는 물론 향후 전개도 예측할 수 있다는 점도 닮았다. 출생의 비밀이나 숨겨진 가족사란 구도 파악이 가능하며, 이후 벌어질 복수나 갈등을 짐작하게 한다.
○ 밥상, 시청자를 TV 앞에 앉히는 주문
KBS1 ‘너는 내 운명’의 경우 9일 마지막 방송이어서 대부분의 갈등이 해소된 상태. 하지만 그 속에도 통속극이 추구하는 바를 엿볼 수 있다.
같은 시기 이 드라마가 분당 최고시청률(51.2%)을 기록한 장면은 175회(6일) 21분대였다. 장새벽(윤아)의 식구들이 모여 두부를 만드는 장면. 새벽의 시어머니와 엄마가 모두 백혈병에 걸린다는 ‘과감한’ 설정도 해결된 뒤 모두 함께 오순도순 행복을 만끽한다.
이 역시 가족이란 통속극의 전형적 코드가 쓰인 것이지만 여기에는 핵심 소품이 있다. 가족을 모으고 갈등을 해소하고 행복을 나누는 도구, 바로 ‘음식’이다.
‘아내의 유혹’도 마찬가지다. 구은재(장서희)의 변신과 복수가 화제지만 실제 분당 최고시청률을 차지한 장면은 다른 곳에 있었다. 49회(8일) 19분대에 방영된, 어른이지만 지능이 낮은 하늘(오영실)이 이혼당한 은재의 친정으로 찾아가 밥을 얻어먹는 장면이 39%로 가장 높았다. 입맛을 잃은 하늘이 “은재 음식 맛이 난다”며 행복해하는 것. 여기서도 음식은 사람의 힘으로 떨어뜨리기 어려운 가족의 정(입맛)을 이어주는 메타포로 표현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를 “음식을 나누는 행위가 가진 인간적 유대감의 발현”으로 설명했다. ‘함께한 밥상’은 평범하지만 가족 같은 친숙한 관계가 아니면 쉽지 않다. 거창한 식탁이 아니다. 손으로 만든 두부, 국과 서너 개의 반찬을 통해 동질감이 공유된다. 곽 교수는 “통속 드라마에 ‘밥상’이 많이 등장하는 건 음식이 인간의 기본 정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는 ‘전통적’ ‘보수적’이란 의미도 포함된다. 가족이 함께 두부를 만드는 것은 요즘 시대에 흔치 않으며 원수 집안의 사람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비친다. 하지만 그 속엔 손님을 박대하지 않고 농사를 짓던 과거 우리네 전통이 담겨 있다. 드라마 평론가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많은 통속극이 ‘권선징악’을 강조하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라면서 “시청자들은 오랜 전통적 가치를 통해 편안함과 안식을 얻으려는 심리가 있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고전 반열 오른 ‘로미오…’ ‘춘향전’도 통속성 지녀▼
요즘 통속극은 ‘조롱의 아이콘’으로 격하되는 경향이 크다. 일부 드라마가 보여준 진부하고 억지스러운 설정 탓이다. 하지만 통속극의 위상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통속이란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세기 서구 유럽 시민사회의 출현과 궤적을 같이한다. 당시 계급사회에서는 상류층 귀족이 향유하는 음악이나 연극 등에만 예술적 가치를 부여했다. 시민들이 즐기는 대중문화는 ‘평민 예술’ ‘하급 문화’ 등으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시민사회 계층이 등장하며 기존의 고급 예술은 ‘엘리트주의’라는 지적을 받기 시작한다. 문학평론가 강유정 씨는 “통속극은 일종의 ‘귀족 문화’ ‘고급 예술’이라 불리던 소수만을 위한 예술에 대항해 대중과 소통하는 문화도 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뜻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초기 통속극은 사회 역사적인 가치가 다분했다.
‘클래식(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도 통속성을 지니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대표적인 사례. 원수 집안 사이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파국으로 치닫는 줄거리는 최근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하는 대중적 코드다. 한국 판소리 ‘춘향전’도 기생의 딸인 여성이 지체 높은 양반집 남성을 만나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을 이룬다.
강 씨는 “춘향전 구도는 현대판 통속소설의 대표격인 ‘할리퀸 로맨스’(일종의 하이틴 로맨스)의 전형에 가깝다”며 “고전으로 받아들여지는 문학이나 희극들도 당시에는 ‘판타지’에 가까운 비현실적 내용을 다루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드라마건 문학이건 통속성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될 순 없다. 오히려 대부분 예술은 통속성을 기저에 깔고 있다. 우찬제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결국 작품성은 우연적 사건 발생이나 비합리적 인간관계,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얼마나 배제하는가의 문제”라면서 “통속극도 보편적인 가치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면 예술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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