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판 너머로 붉은 꽃잎이 비추인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자 꽃잎이 살그머니 몸을 뒤챈다. 붉은 색감이 유리판 위로 느리게 번진다.
몽환과 감성. 너무도 섬세해 건드리면 부서질 것만 같은 터치의 피아니스트 윤디 리(27)가 6년 만에 한국팬들을 위해 홀로 건반 앞에 앉는다.
예의 유리알 같은 미성(美聲)의 반지를 열 손가락 가득 끼고서.
윤디 리는 21세기의 피아니스트이다. 거장의 시대로 불리는 20세기를 마감한 세계 음악계는 2000년 쇼팽 국제콩쿠르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1위를 차지한 중국의 미소년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피아노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이 콩쿠르는 역대 최연소의 나이(17세)로 윤디 리가 우승하기까지 무려 15년간 1위 자리를 공석으로 ‘방치’했다.
윤디 리에 대한 세계 음악계의 반응은 ‘폭발적’이 아닌 ‘폭발’ 그 자체였다. 중국 대륙인들이 느낀 감동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가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자 가장 먼저 달려온 곳은 최고의 클래식 음반사 도이치그라모폰. 윤디 리의 데뷔 앨범은 발매 첫 날 홍콩에서만 50만장이 팔리는 기적을 일으켰다.
윤디 리는 쇼팽 콩쿠르 우승자답게 쇼팽의 스페셜리스트로 통한다. 아르헤리치, 폴리니, 침머만, 당 타이손, 부닌 등 선배 우승자들의 계보를 당당히 이어 나가고 있는 그의 피아니즘의 정수는 앞서 말했듯 ‘윤디 리 표 감성’에 있다.
남들에 비해 그는 화려한 기교를 앞세우지 않는다. 한 마리 준마에 올라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기보다는, 풀 한 포기 바람에 살랑이듯 부드럽게 두 발로 달린다. 빠르지만 메마를 수밖에 없다면, 그는 기꺼이 속도를 포기하는 사람이다.
스포츠카로 달려선 진짜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진실에 그는 익숙한 듯 보인다.
건반 한 음 한 음에 쏟아지는 세계 음악계의 찬사와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선 스타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2003년 한국 데뷔 리사이틀(대박이 났다) 이후 오케스트라 협연자로 몇 차례 한국을 다녀갔지만 대부분 ‘조용한 방문’이었다.
거의 매년 방문하면서도 시끌벅적한 프로모션을 벌이곤 했던 같은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과는 정반대의 운신이다.
윤디 리는 15일과 18일 고양아람누리와 예술의전당에서 두 차례 피아노 앞에 앉는다.
공연의 감상 포인트. 그의 음악적 해석도 좋지만 윤디 리의 진가는 물방울처럼 투명한 음색에서 빛난다.
자칫 음악보다는 윤디 리의 꽃남스러운 얼굴에 집중력을 빼앗길 수 있으니 가끔씩은 눈을 감을 것.
눈을 감으면, 윤디 리의 진짜 얼굴이 보인다. 아니, 들린다.
2월15일(일) 5시|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 2월18일(수)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문의: 크레디아 02-318-4304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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