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섹시아이콘 ‘재기의 링’에 서다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2월 17일 02시 55분



미키 루크의 ‘더 레슬러’ 내달 5일 개봉

《“15년 동안 망가진 커리어를 회복할 기회를 준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에게 감사한다.” 8일 영국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62회 영국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더 레슬러’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미키 루크(57)의 수상 소감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무엇과 섹스할지’ 조언해준 홍보담당자”를 언급하자 객석에서는 쓴웃음이 나왔다. 스트리퍼 역으로 함께 출연한 마리사 토메이에 대해 “늘 벗고 있는 그를 감상하는 데 몰입했다”고 할 때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둔 사람이 적잖았다.

험한 농담과 짙은 선글라스로 어색한 표정을 감춘 이 배우는 22일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같은 작품으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있다. 국내 개봉은 3월 5일.

‘더 레슬러’는 미키 루크의 고해성사 같은 영화다.

‘보디 히트’ ‘엔젤 하트’로 명성을 얻은 그는 1980년대 섹시 아이콘이었다. ‘나인 하프 위크’ ‘와일드 오키드’에서 보여준 퇴폐적 매력은 다른 배우가 대신하기 어려웠다. 그를 스포트라이트 밖으로 밀어낸 것은 여성편력과 음주벽. 무절제한 사생활은 촬영장에서 무책임한 돌출행동으로 이어졌다. 루크는 최근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1991년 ‘할리와 말보로 맨’부터 스스로를 망가뜨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더 레슬러’의 주인공 랜디 로빈슨도 1980년대가 전성기였던 사내다. 링을 떠난 그에게 남은 것은 비좁은 트레일러 셋방뿐. 슈퍼마켓 아르바이트도 구하기 어렵다. 인연이 끊겼던 딸에게 의지하려 했지만 원망 가득한 욕설만 듣는다. 유일한 말동무인 단골 술집 스트리퍼 캐시디(토메이)에게 고백한 사랑은 여지없이 거절당한다.

루크는 1991∼1995년 프로 권투선수로 활동했다. 경기 중 입은 얼굴 상처를 없애기 위한 성형수술의 부작용 때문에 너덜너덜해진 그의 얼굴은 용도 폐기돼 죽어가는 레슬러의 삶을 요약해서 보여준다.

영화 중반 딸에게 “혼자인 게 당연해…. 난 그냥 짓이겨진 고깃덩어리일 뿐이니까”라고 흐느끼며 사과하는 로빈슨의 얼굴에는 아내를 폭행하고 약물중독에 빠졌던 루크의 과거가 겹쳐진다. 애러노프스키 감독은 링 위에서 반칙을 당해 스테이플러 침이 박히고 포크로 찍히는 레슬러의 등에 시선을 고정했다. 누덕누덕 기워진 루크의 등 위로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주제가가 붉은 피와 함께 흐른다.

‘으스러진 뼈와 상처를 안고…한심한 외다리 꼴로 춤을 추고 있는 것은…그저 그게 나의 운명이었기 때문….’

탄탄했던 가슴 근육을 잃고 배불뚝이 할아버지 레슬러로 돌아온 루크를 보는 시선은 아직 복잡하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9일 “시상식 후 파티에서 밤새워 즐기겠다고 호언했던 왕년의 ‘배드 보이’가 수줍은 얼굴로 한쪽 구석에 서 있다가 슬며시 사라졌다”고 전했다.

이 작품의 주연은 원래 니컬러스 케이지였다. 루크의 부탁으로 주연을 바꾼 애러노프스키 감독은 “모든 제작사가 루크를 이유로 투자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더 레슬러’에서 로빈슨은 개과천선하는 듯하다가 한순간의 충동을 못 이겨 실수를 반복한다. 더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어진 그는 잠깐이라도 한 번 더 살고 싶다는 심정으로 마지막 링에 오른다.

이번 재기는 망가진 루크의 육체를 이용한 짤막한 이벤트일 수 있다. 그의 남은 배우 인생 방향은 다음 작품 ‘세인트 빈센트’에 달려 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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