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힘들었던 건 무술장면도, 영어대사도 아니었어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란 물음이었죠. 생소한 환경에서 주어진 배역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런 절 보고 박찬욱 감독님이 그러더군요. 뜻이 거기 있으면 하는 게 옳다고.”
배우 이병헌 씨(39)의 할리우드 진출작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이 베일을 벗고 8월 6일 국내 개봉한다. 29일 서울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만난 이 씨는 “첫 단추에 배가 터지겠냐. 내가 나왔다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영화는 최정예 특수군단 ‘지.아이.조’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 군단 ‘코브라’의 한판 승부를 그린 작품. 1964년 완구회사에서 모형으로 처음 만들어진 후 마블코믹스를 통해 만화책과 TV 시리즈로 제작됐다. ‘매트릭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트랜스포머’를 성공시킨 프로듀서 로렌조 디 보나벤투라가 제작자로, ‘미이라’ 시리즈의 스티븐 소머스가 감독으로 참여했다.
이 씨가 맡은 역할은 테러리스트 군단 ‘코브라’의 비밀병기 스톰 섀도 역이다. 스톰 섀도는 계약한 임무에 대해서는 선악을 가리지 않고 완벽하게 처리하는 냉혈한. 당초 공개된 예고편에서 비중이 작아 ‘이병헌의 굴욕’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하지만 영화에선 출연분량이 1시간 정도나 된다. 영어대사도 수준급으로 구사한다. 이 씨는 “18세 때 국내 어학원에서 2년간 영어를 배웠는데 그때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미국에선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는 원작이라 기대가 대단해요. 하지만 국내에선 그렇지 않아 고민이었죠. 원작 마니아들은 제 연기를 만족스럽다고 할 테지만, 기존 아시아 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이번 기자회견을 위해 내한한 소머스 감독은 이 씨를 캐스팅한 이유로 “보자마자 매료되는 눈”을 꼽았다. “스톰 섀도는 아시아인이자 훌륭한 배우여야 했어요. 이 씨가 출연한 영화를 봤는데 무엇보다 그 눈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이 씨는 바로 그 눈을 가졌습니다.” 함께 출연한 채닝 테이텀도 “공항에 이렇게 많은 (이 씨의) 팬들이 있는 건 처음 봤다”며 “그는 이런 유명세에 우아하게 대처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2008년)에서 나쁜 놈 창이에 이어 ‘지.아이.조’의 테러리스트, 올해 개봉할 미국 영화 ‘나는 비와 함께 간다’의 홍콩 암흑가 두목 수동포 역 등 최근 들어 악역을 자주 맡았다. 이 씨는 “매번 돌다리만 두드렸던 내게 마음을 열게 해준 역할들”이라고 말했다. “수동포 역은 1년간 결정을 내리지 못했어요. 처음 해보는 조연에 시나리오도 이해를 못했죠. 그러다가 마음을 먹고 ‘놈놈놈’과 ‘지.아이.조’와 동시에 계약을 해버렸어요. 늘 악역을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앞으로 악역만 들어오면 어떡하나 고민이 들기도 하네요.”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