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상반기 문화예술계의 키워드는 ‘엄마’다. 강부자 씨가 주연한 연극 ‘친정엄마와 2박 3일’은 올 상반기 연극작품 중 최고 히트상품이다. 1∼3월 1차 공연에서 유료점유율 95.3%를 기록한 이 작품은 7월 초 서울 앙코르 공연에 들어간 뒤 공연예매 전문업체 인터파크의 연극 분야 랭킹 1위를 9주째 기록하며 누적 관객 6만 명을 넘어섰다. 지난해 말 발표된 신경숙 씨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줄곧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으며 100만 부 판매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 밖에도 올해 공연과 영화, TV 드라마에서 엄마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이 엄마들의 활약상을 올스타전으로 재구성해 본다.
○ 에이스와 4번 타자
‘엄마를 부탁해’의 엄마는 팀의 기둥이 되는 부동의 에이스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엄마의 실종을 통해 엄마의 소중함을 포착한 소설 속 엄마는 ‘모녀관계’란 빠른 볼, ‘모자관계와 부부관계’란 변화구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전천후 투수다. 가족을 위해 애틋한 사랑의 감정마저 철저히 감춰뒀던 엄마의 연애담은 전통적 인고의 어머니상을 뒤집는 마구(魔球)의 위력을 보였다.
‘친정엄마와 2박 3일’의 정 많은 엄마는 어김없이 관객의 눈시울을 적시는 4번 타자다. 간암에 걸린 딸을 잃게 된 ‘에미’의 심정을 방망이 삼아 불효막심한 자식들의 가슴을 통타한다. “왜 자꾸 나 땜시 못산다고 그러냐, 난 너 땜시 사는데”란 엄마의 대사는 “그놈의 잔소리 지겨워”(1루), “엄마가 뭘 알아”(2루), “엄마가 내게 해준 게 뭐 있어”(3루)를 꿰뚫는 안타가 된다. “너한테는 참말 미안허지만 나는 니가 내 딸로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엄마의 대사는 마침내 “엄마, 미안해”를 끌어내는 홈런이 되고 만다.
○ 키스톤 콤비
2009 엄마 올스타팀에서 가장 안정적 수비를 자랑하는 선수로는 연극배우 손숙 박정자 씨를 꼽을 수 있다. 올해 공연 10주년을 맞은 ‘손숙의 어머니’에서 “여자 혼자 산다꼬 남들이 넘볼까 봐 내 정말 억척스럽게 살았다”는 엄마는 혹독한 시집살이와 남편의 바람기, 자식의 죽음이라는 난코스의 공을 기막힌 수비로 잡아내는 질긴 생명력을 보였다. 연극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에서 18년간 꾸준히 엄마 역을 소화해 온 박정자 씨는 “너도 이 다음에 너만큼 못된 딸년을 둬봐야 내 맘을 알거다”라는 대사로 딸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이어 23년 만에 온달모(母) 역을 맡은 연극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에선 절제된 모성 연기로 찬사를 받았다. 눈을 맞으며 “눈이 오는군…오늘은 산에서 자는 날도 아닌데… 왜 이렇게 늦는구?”라며 죽은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모습은 ‘친정엄마…’에서 꽃비를 맞으며 목메어 우는 강부자 씨의 연기와 강렬한 대조를 이뤘다.
○ 스위치히터 혹은 도루왕
김혜자 씨 주연의 영화 ‘마더’의 엄마와 TV 드라마 ‘찬란한 유산’의 김미숙 씨가 보여준 엄마는 전통적 모성상을 뒤흔들었다. ‘마더’의 엄마는 아들을 위해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아 자애로운 모성상에 익숙한 관객에게 충격을 줬다. 김미숙 씨가 처음으로 악역에 도전해 화제가 된 ‘찬란한 유산’의 승미 엄마는 친딸을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기 위해 의붓딸을 쫓아내고 자폐아인 의붓아들을 유기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런 모성상은 외환위기 못지않다는 경제위기 속에서 ‘내 핏줄만은 내줄 수 없다’는 극단적 가족이기주의의 표출로 풀이된다. 영화 ‘가족의 탄생’ 등을 통해 확장돼 온 가족 개념을 경제위기 속에서 다시 핏줄 중심으로 응축하려는 사회심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비전통적 엄마의 등장은 투수의 약점을 파고들기 위해 좌우 타석을 이동하는 스위치히터의 활약에 견줄 수 있다. 한편 익숙한 드라마문법에 심취한 관객의 마음을 훔쳤다는 점에선 도루왕이란 표현도 가능하지 않을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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