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은 지혜로운 배우다. 뭐랄까, 여우 같다. 자기 매력과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으며, “어머, 너무너무 멋져요!”라는 팬들의 환호에 마취돼 자신을 과대평가하지도 않는다. 그가 나이 마흔이 되어 미국 할리우드에 진출한 영화 ‘지.아이.조-전쟁의 서막’을 보면서 나는 무릎을 쳤다. 그는 한입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약았다. 할리우드가 자기에게 원하는 바를 정확히 간파했고, 한국과 아시아시장에서 보유한 자기 매력에서 벗어나려 하지도, 그것을 과장하려 들지도 않았다. 영어 대사를 통해서도 그는 로맨틱하면서 살짝 우울한 자신의 이미지를 거의 완벽히 재생산해냈다. 이병헌, 그는 왜 똑똑한가?
자, 할리우드가 이병헌을 캐스팅한 이유는 무얼까? 첫째는 한류스타의 인지도를 통해 아시아시장을 확보하기 위해서고, 둘째는 무술과 신비로움이라는 아시아배우의 이미지를 활용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할리우드에 진출한 아시아스타들은 이 과정에서 두 가지 우(愚)를 범하기 일쑤다. 하나는 극악무도한 악당이나 우스꽝스러운 조연으로 출연해 자국 팬들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일(중국배우 저우룬파·周潤發, 리롄제·李連杰, 청룽·成龍의 작품 중 적잖은 경우가 그랬다)이고, 또 하나는 ‘나 이제 세계적인 배우야’ 하고 으스대면서 기고만장해지는 현상(국내에도 있는데 차마 밝히질 못하겠다)이다. 하지만 이병헌은 무술액션을 보이면서도 당초 단순했던 자기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해석해내는 발군의 기량을 보였고, 한국 팬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줄도 알았다.
캐릭터 과장없는 절제미가 ‘악당질’에 되레 부피감 줘
당초 설정 日닌자 역할 ‘개조’ 태권도복 입혀 한국 팬 배려
먼저 캐릭터 해석. 사실 이병헌이 ‘지.아이.조’에서 맡은 ‘스톰 섀도’란 인물은 무척 단순한 놈이다. 열등감을 이기지 못해 무술 스승을 제 손으로 살해한 자로, 흰옷에 백구두를 신고 다닌다. 하지만 뼛속부터 나쁜 놈이 어디 있겠는가? 이병헌은 사연이 깃든 듯한 중저음 목소리와 깊은 표정을 통해 스톰 섀도가 지닌 트라우마(정신적 상처)를 표현해 냈다. 그의 연기는 과장하거나 흥분하지 않으며, 오히려 조용하고 차가운 쪽이다. “그 녀석(스톰 섀도의 라이벌인 ‘스네이크 아이즈’란 인물)은 결코 포기를 모르는 놈인데(He never gives up)…”라고 말하면서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는 순간에도 자기중심을 잃지 않는다. 캐릭터를 과장하는 게 아니라 감추고 절제함으로써 ‘악당질’에 개연성과 부피감을 불어넣는다. 아픈 과거를 회상할 때 보여주는 그의 눈빛과 표정은, 이 영화의 주연배우 채닝 테이텀이 자기배역(‘듀크’)을 단순무식하게 해석한 것과 대조되면서 더욱 빛났다.
그 다음은 한국 팬에 대한 사려 깊음. 그는 감독을 설득해 당초 일본 닌자로 설정됐던 자신의 아역을 ‘개조’했다. 태권도복을 입은 한국인으로 설정해 “뭘 훔치고 있었어요” 같은 한국어 대사를 구사하도록 한 것이다. 미국 관객들로서는 한국어인지 일본어인지 분간할 수도, 분간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병헌은 ‘국내 팬들의 지지 없이는 결코 글로벌 스타가 될 수 없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
이병헌의 영어가 완벽했던 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인이 하는 것 같은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기보다는 캐릭터에 들어맞는 영어발음과 억양을 구사하는 데 포인트를 맞춘다. 영어대사를 ‘발음’의 문제가 아니라 ‘연기’의 문제로 가져간 것이다. 비(정지훈)가 할리우드 진출작 ‘스피드 레이서’에서 자의식이 과잉된 영어를 구사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는 “두려움이야말로 대단한 원동력이지(Fear is a great motivator)” 같은 대사에서도 ‘motivator’란 단어를 “머리베이러”라고 발음하기보다는 “모티베이러”라고 발음했다. ‘나 미국인처럼 보이고 싶어요!’라는 욕망을 드러내기보다는 살짝 지적인 냄새를 풍기려 한 것이다. 유창한 체하는 대신 정확하면서 차가운 느낌의 발음을 구사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악당인 그가 ‘좋은 편’인 스네이크 아이즈와 맞서 싸우면서 온몸을 난자당하는 순간, 관객이 통쾌함보다는 안타까움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는 것도 그가 목소리와 영어발음, 표정을 통해 우수(憂愁)에 찬 캐릭터를 구축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이병헌, 그는 뼛속까지 배우인 것 같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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