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는 나의 힘’ 시네마 민주주의 시대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0월 17일 16시 55분


제작비가 2000만 원도 안 되는 할리우드 공포 영화 '파라노말 액티비티'(Paranormal Activity, 비과학적 행동)가 개봉 3주 만에 미국 박스 오피스 4위에 오르며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 부산영화제를 통해 국내에도 소개된 이 영화는 단돈 1만 5000달러(약 1750만원)로 제작해 11일까지 제작비의 600배가 넘는 911만 달러(약 106억원)를 벌어들였다.

1만 5000달러는 영화 제작비라고 하기엔 푼돈이다. 우리 영화 '워낭소리'의 제작비가 1억5000만 원, 류승완 감독의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제작비는 6500만 원이다. 특히 류 감독은 제작비를 아끼려 선배 감독이 버린 자투리 필름까지 주워다 썼다고 한다. 할리우드에서 이 정도 돈으로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이다.

'초저예산'이다 보니 이름 있는 배우도 없고, 공포 영화에 으레 나오는 컴퓨터 그래픽도 없다. 각본도 오렌 펠리 감독이 직접 썼다. 그는 비디오 게임 프로그래머를 하다 이번에 입봉한 신인이다.

영화는 밤마다 정체불명의 소음에 지친 부부가 비디오 카메라를 설치해 소음의 정체를 찾는다는 내용. 10년 전 개봉한 '블레어 위치'처럼 '페이크 다큐멘터리'(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한 극영화) 기법을 써서 실제 벌어진 사건을 녹화해 보여주는 것처럼 관객을 속였다. 영화 시작 화면에는 "우리 영화사에 필름을 보내준 케이티 피더스턴, 미카 슬로앳 부부와 샌 디에이고 경찰 당국에 감사드린다"는 자막이 나온다. 관객 중에는 유령 집을 다룬 디스커버리 채널 '유령 사냥'시리즈처럼 초자연적인 현상을 찍은 다큐멘터리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다.

영화는 지난달 25일(현지 시간) 대학가에 있는 12개 상영관에 걸렸다. 흔한 TV 광고도 하지 않고 소리 소문 없이 개봉했다. '저비용 정신'에 입각한 배급사는 홍보도 돈 안 드는 관객의 입소문 마케팅(viral marketing)에 기댔다. 배급사는 최근 고위 경영진 2명을 해고한 파라마운트 영화사다.

영화계에서 입소문 마케팅이라고 하면 배급사가 고용한 알바생이 영화관련 인터넷 게시판에 "이 영화 최고예요"라고 칭찬 일색의 감상문을 쓰고 별 다섯 개를 꾹 찍어 올리는 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파라노말 액티비티'는 다른 방법을 썼다. 이른바 '시네마 민주주의(cinematic democracy)'로 불리는 이 방법은 관객이 자기 지역 극장에 영화를 걸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배급사는 우선 인기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영화를 보며 놀라고 비명을 지르는 객석 반응이 담긴 홍보 영상을 올렸다. 동영상 끄트머리에는 "아직도 여러분의 동네 극장이 '파라노말 액티비티'를 걸어놓지 않았습니까? 요구하십시오! 홈페이지에 오시면 당신의 도시에도 영화가 상영됩니다"라는 문구를 적어 놓았다.

지시문을 따라 영화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상영을 요구하는 글을 보낼 수 있도록 서식과 '보여주세요'라는 버튼이 있다. 동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들은 우편 번호와 생년월일 등을 적고 '보여주세요' 버튼을 클릭하면 된다. 일종의 투표인 셈이다. 관객 수가 충분히 쌓이면 배급사는 극장에 요구를 전한다. 최근까지 100만 명 이상이 자기 지역에도 영화를 걸어달라고 했다. 롭 무어 파라마운트 부사장은 언론에 "처음부터 우리는 영화의 운명을 팬들의 손에 맡기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개봉 2주 차인 10월 1일에는 상영관 수가 33개로 늘어났다. 9일에는 44개 도시 160개 상영관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게 됐다. 11일까지 금토일 3일간 벌어들인 수입은 790만 달러에 달했다. 평균 잡아 상영관 1곳에서 5만 달러가량 벌어들인 셈이다. 제작비의 3배에 달하는 액수를 한 상영관에서 뽑아낸 것이다.

자기의 손으로 영화를 동네 극장에 끌어들인 관객들은 충성도도 높다. 이들은 인터넷 트위터와 페이스 북에 열성적으로 감상을 남기며 '파라노말 액티비티 신드롬'을 이어갔다. 두 번 세 번 영화를 본 관객들도 있다. 미국 언론들은 이 영화가 "홍보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영화는 원래 2007년 스크림 페스트 공포영화제에 잠깐 소개됐는데 '천재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눈여겨보고 저작권을 산 후 감독에게 다시 편집하게 해 2년 만에 재개봉했다. 16일 폐막한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이다.

최현정 동아닷컴 기자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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