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없애고… 필름 아끼고… 출연료 깎고…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1월 5일 03시 00분


■ 쏟아지는 ‘10억 상업영화’ 제작비 절감 비결은

10월 29일 개봉한 영화 ‘파주’에는 굴착기를 앞세워 재개발을 밀어붙이는 업자와 이에 저항해 벽돌과 화염병을 투척하는 철거민이 등장한다. 이 장면을 별도 세트장에서 촬영했다면? 세트 제작 비용만 최소 5억 원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작진은 다른 방법을 택했다. 경기도 내 철거 예정지를 대여료 없이 빌렸다. 들어간 돈은 벽면 일부를 허무는 리모델링 비용과 청소비를 합쳐 5000만 원. 세트 비용을 10분의 1로 절감한 것이다.

영화 전반에 깔리는 안개도 최소 비용으로 만들었다. 전기료와 장비 대여료가 드는 ‘포그 머신’ 대신 원두커피를 태워 펌프질하는 방법을 택했다. 제작진 11명의 일손이 필요했지만 포그 머신보다 더욱 자욱한 안개를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영화 ‘파주’가 쓴 순제작비(마케팅비 제외)는 10억 원. 영화진흥위원회가 밝힌 2008년도 평균 순제작비(20억7000만 원)의 절반도 안 되는 액수다.

○ 아끼고 또 아낀 ‘10억 원 영화’ 등장

최근 순제작비 10억 원 미만을 들인 상업영화가 속속 제작 개봉되고 있다. 6억 원 미만을 들인 영화 ‘부산’을 비롯해 ‘토끼와 리저드’ ‘집행자’ ‘나는 행복합니다’ ‘여배우들’ ‘폭풍전야’ 등이 이미 개봉했거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제작비 10억 원짜리’ 상업영화다. 스타 배우들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것도 ‘의외의’ 특징이다. 영화 ‘토끼와 리저드’의 성유리와 이재용 감독의 영화 ‘여배우들’에 출연하는 윤여정 고현정 이미숙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 등은 아예 ‘노 개런티’로 출연했다.

‘순제작비 10억 원’이란 많은 상업영화 제작자들에게 ‘기본 견적’조차 나오지 않는 불가능한 비용에 가깝다. 영진위 통계에 따르면 12년 전인 1997년 한국 영화의 순제작비 평균은 11억 원. 이후 연간 한국 영화 총제작비 규모는 767억 원(1997년)에서 3401억 원(2008년)으로 5배 가까이로 뛰었다.

영화 ‘집행자’의 양종곤 프로듀서는 “독립영화도 아닌 상업영화가 10년 전보다 낮은 비용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건, 깎을 수 있는 거라곤 스태프의 인건비밖에 없는 최소한의 예산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워낙 많은 사람의 ‘푼돈’을 모아 만든 탓으로 흥행이 되면 수익 분배도 쉽지 않을 지경이라는 것. 그럼에도 이런 규모의 영화가 제작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영화 ‘파주’ 제작사 TPS의 김주경 대표는 “예전만큼 투자자가 나서지 않으면서 ‘이 돈이라도 없으면 영화를 찍을 수 없다’는 한계 상황이 저예산 영화를 만든다”며 “그래도 그런 절박한 상황이 비용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는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 치밀한 계획 세워 ‘짧고 굵게 찍기’

작품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작비를 살뜰하게 쓰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중 하나는 세트장이 아닌 ‘실제의 장소’를 로케이션 장소로 섭외하는 것. 사형집행관이 주인공인 영화 ‘집행자’는 교도소 세트를 짓는 대신 두 달 동안 법무부를 설득해 화성직업훈련교도소를 촬영장소로 섭외했다. 러닝타임의 절반 가까이를 이곳에서 찍으면 4억∼5억 원의 세트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정신병동의 과대망상증 환자가 등장하는 ‘나는 행복합니다’도 개업하기 직전의 병원을 섭외해 100% 촬영을 마쳤다.

제작에 들어가기 전의 ‘프리프로덕션’ 과정을 강화해 촬영 회차와 러닝타임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도 제작비 절감에 널리 쓰이는 방법이다. 촬영 회차가 한 번 추가될 때마다 500만 원가량의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한국 영화 평균 촬영 회차는 60회. 그러나 정확한 사전 예측에 따라 40회까지 촬영 회차를 줄이는 영화도 많아졌다.

촬영 방식도 다양화되고 있다. 일부 영화는 35mm 필름 카메라 대신 필름 비용 부담이 없는 HD카메라나 필름 값이 저렴한 슈퍼 16mm 카메라를 사용한다. 영화 ‘파주’는 슈퍼 16mm 카메라를 선택해 필름 값 1억 원이 드는 35mm 카메라의 30% 비용만 투입했다.

○ 새로운 돈줄 찾기 아이디어도 다양

한정된 예산을 짜게 쓰는 법 외에 돈을 끌어들이는 법도 다양해지고 있다. 제작사들이 대형 투자사에 기대지 않고도 영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새로운 ‘돈줄’을 찾는 것. 대표적인 예가 ‘노근리 사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이다. 당초 40억 원으로 기획됐지만 후반작업 업체 및 장비 관련 업체의 현물투자를 받아 10억 원의 예산밖에 들지 않았다. 세트팀 ‘난든집’과 시각효과업체 ‘모팩 스튜디오’가 현물투자 하는 대신 영화 개봉 후 얻을 수익을 나눠 가질 수 있도록 계약을 했기 때문이다.

영화 ‘파주’도 순제작비 10억 원 중 2억 원을 배우와 스태프들이 자신들의 개런티 일부를 투자하는 ‘노무 출자’ 방식으로 모았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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