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안현진] 美CBS ‘빅뱅 이론’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1월 6일 14시 39분


이공계생이 더 공감할만한 폭발적 유머
과학도들에게 더 사랑받는 미드 ‘빅뱅 이론’
과학도들에게 더 사랑받는 미드 ‘빅뱅 이론’

"우주는 옛날엔 뜨겁고 밀도 높은 물질이었죠. 그러다 140억 년쯤 전부터 팽창을 시작했어요."

CBS의 월요일 저녁을 책임지는, 시트콤 '빅뱅 이론'(The Big Bang Theory) 테마곡의 첫 소절이다. 미디엄템포로 시작해서 우주 팽창 속도를 따라잡으려는 듯 숨가쁘게 지구 역사를 요약정리하는 이 노래는, 평균 3초 간격으로 크고 작은 웃음을 선사하는 '빅뱅 이론'에 더 없이 어울리는 오프닝이다.

한 TV평론가는 이 노래를 두고 "빠르고, 영리하며, 따라가기도 버거운 언어유희"라고 호평했는데, 그 칭찬을 그대로 '빅뱅 이론'에 비추어도 틀린 말은 아닐 거다. 한회 21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알차게 채운 캐릭터 시트콤인데다가, 일반인이라면 이해불가능한 과학용어의 향연이 펼쳐진다. 하지만, 한가지는 알고 시작하자. 빅뱅 이론(우주의 시작을 설명하는 가설 중 하나)을 몰라도 이 시트콤을 보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물리학자 레너드와 쉘던이 사는 허름한 아파트 4A호의 앞집 4B호에 페니라는 금발 미녀가 이사오면서 '빅뱅 이론'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고리타분한 과학자' '여배우 꿈꾸는 금발 미녀' 직설적 유머로 승부

'빅뱅 이론'은 갑작스럽고 억지스러운 상황 보다는 차곡차곡 쌓아 올린 캐릭터로 웃음을 주는 시트콤이다. 특히 과학과 과학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제대로 활용한다. "과학은 따분한 것, 과학자는 재미없는 사람들"이라는 일반적 통념이 주인공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이론 물리학자이며 IQ 187의 천재 과학자 쉘던과, IQ 173의 실험 물리학자 레너드는 집과 대학 연구소를 오가는 틀에 박힌 생활을 하고 있다.

운동 No! 음주 No! 연애? 당연히 안한다. 사실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지만. 친구들이라고 다를까? '빅뱅 이론' 속 과학자들은 똑같다. 여자만 보면 껄떡대지만 성과는 비참한 하워드나, 여자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하는 라지 역시 '고리타분한 과학자'의 단면들이다. 고정관념을 그대로 투사하는 직설법은 '빅뱅 이론'의 홍일점 페니에게도 예외 없다. 여배우의 꿈을 안고 캘리포니아로 이사 온 금발 미녀는 오래 전 마릴린 먼로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킨 섹스 심벌의 조금 귀여운 버전일 뿐이다.

다음은 '빅뱅 이론'의 에피소드 중 한 장면이다. 레즐리라는 여자 과학자에게 레너드가 데이트를 신청하려는데, 레즐리가 묻는다. "첫 데이트가 다음 데이트로 이어지려면, 굿바이 키스의 호감도에 따라 90% 결정된다는 데 동의해?" 레너드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레즐리는 앞뒤 다 떼어먹고 키스부터 퍼붓는다.

에두름이 없는 비낭만적 연애에 대한 메타포는 시리즈 전체를 쥐고 흔드는 직설적인 유머의 일부일 뿐이다. 거대한 군중에 숨어 우리가 사교성과 예의를 논하느라고, 혹은 자존심과 이기심을 계산하느라고 감추고 숨겨온 진심들이 '빅뱅 이론'에서는 고스란히 드러난다.

미국인들의 이공계 스타일 하위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미국인들의 이공계 스타일 하위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진부하지만 끌릴 수밖에 없는 캐릭터

이론과 실험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는 4명의 과학자와, 상식과 이해로 살아온 여자 한명의 이야기는, 레너드와 페니 사이에서 일어나는 뜨뜻미지근한 화학반응을 중심으로 매회 웃음을 더해갔고, 그 결과 평균 시청자수 1100만명, 만 18세부터 49세의 핵심 시청률 분석에서 상위를 고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상극인 남녀조합이라는 진부한 설정의 시리즈가 시즌마다 시청률을 더해가며 탄탄한 효자 프로그램으로 거듭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빅뱅 이론'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잊을 수 없는 캐릭터, 쉘던의 공이 크다. "천재"라는 궁색한 설명 말고는 이해할 길이 없는 쉘던은 극단적 강박 관념의 소유자. 월요일에는 타이 음식, 화요일에는 햄버거을 먹어야 하고, 수요일 밤엔 친구들과 모여 비디오 게임을 해야 하고, 목요일엔 피자를 먹어야 한다. 사회성 제로, 사교성 제로의 그는 그러나, 천재라는 사실을 지우고 바라보면 지독하게 외로운 어린아이일 뿐이다. 냉소와 반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짓말과 비밀에 마음을 졸인다.

다른 친구들도 다를 바 없다. 잘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이 되어버려 직업으로까지 이어진 이들은 그 나이에 걸맞은 매너는커녕 사춘기에서 성장을 멈추었다. 비디오 게임에 열광하고, 할로윈엔 SF 코스프레를 하고, 변변한 여자친구 없이 자기들끼리 어울리는 모습은 일견 우습지만 한편으론 씁쓸하다.

하워드는 성욕을 주체 못하는 인기 없는 10대 소년이고, 알코올의 힘을 빌려야 여자 앞에서 입을 여는 라지 역시 미숙한 남자의 원형이다. 그런데 고등학교에서 만났더라면 눈도 마주치지 않았을 페니와 4명의 과학자들은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접점을 넓히고 서로를 이해해 간다.

모든 캐릭터들이 유약하고 천박하지만, 미워할 수 없다.
모든 캐릭터들이 유약하고 천박하지만, 미워할 수 없다.

시청자를 TV에서 컴퓨터 앞으로까지 움직이게 한 힘

시즌4까지 방영이 예약된 '빅뱅 이론'의 성공은 예상된 결과였으나 또 한편 예상 밖의 결과이기도 했다. CBS의 또 다른 효자 시트콤 '투 앤 어 하프맨'의 제작자이자 작가인 척 로르가 처음 제작한 파일럿이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못된 페니의 캐릭터를 사랑스럽게 바꾼 뒤 다시 제작한 두번째 파일럿은 첫 시즌 전체 방영으로 이어졌다.

척 로르는 훌륭한 코미디 작가지만 과학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래서 '빅뱅 이론'의 모든 대본은 UCLA 물리학 교수인 데이비드 살츠버그의 손을 거친다. 쉘던의 화이트 보드에 적힌 수식들도 엉터리가 아닌 현재진행형인 물리학 문제라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빅뱅 이론'의 많은 부분은 물리학과 코믹스, SF 등 특정한 문화에 기반을 둔다.

'스타트렉'의 손가락 인사가 빈번히 등장하고, 슈퍼맨에 대한 지엽적 지식을 가지고 말싸움을 하는 등 기크(geek)와 너드(nerd)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문화가 유머의 소재가 된다. 그래서일까? 그냥 봐도 재밌지만 알고 보면 100배는 더 재밌을 '빅뱅 이론'을 포스팅하는 블로그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가장 흔하게는 시트콤에 등장한 물리학 용어 풀이에서부터, SF, 코믹스 컬쳐에 대한 설명, 깊게는 '스타트렉'의 스팍을 숭배하는 쉘던이 진정 캐릭터에 충실하려면 채식주의자여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빅뱅 이론식 유머
빅뱅 이론식 유머

이렇듯 시청자를 TV앞에서 컴퓨터 앞으로까지 움직이게 한 '빅뱅 이론'은 다분히 시청자 중심의 제작방식을 따라 만들어졌다. 방청객을 사운드스테이지로 초대해 '빅뱅 이론'을 녹화하는 장면을 공개하는 전통적인 시트콤 제작방식, 즉 구식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시트콤 현장공개라는 대담하면서도 유혹적인 방식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은 이 드라마는, 극한의 설정으로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요즘 드라마들과는 다르게, 연출과 연기의 힘으로 이뤄진 "솜씨의 작품"이다. 방송 중 삽입된 박수와 웃음소리가 현장에서 녹음된 관객의 반응이란 걸 알고 나니, CBS 스튜디오의 방청석에 앉아 배우들이 이끌어가는 무대의 현장감을 느끼고 싶을 정도다. 노래 잘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가서 앉은 기분일까?

쉘던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리학 방정식에 대해 숨 한번 쉬지 않고 읊는 것만한 전율은 또 없을 것 같다면 과언일까?

한 가지 더, 사족이라는 것도 알고, 모두가 동의할 거라 기대도 하지 않지만, 나는 너드섹슈얼(nerd-sexual)이 좋다. 테스토스테론이 과다분비되는 메트로섹슈얼, 위버섹슈얼 등 알파메일의 대열에서는 1억광년쯤 떨어져 그 존재를 알리기에도 힘이 겨운 이 남자들은, 초식남처럼 세련되지도 않았고, 로맨틱하기보다는 건조하고, 세심하기 보다는 소심해 연애하기 재밌는 상대는 아닐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래서 여자에게 상처주기도 전에 먼저 물러서서 늘 뒤에만 서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페니의 곁에서 위성처럼 맴도는 레너드를 보며 문득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갑자기 이 순진한 남자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여자는 모성본능으로도 상대를 사랑할 수 있는 대인배니까.

안현진/ 잡식성 미드 마니아 joey04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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