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김현진] 스타일 인 셀럽 ②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1월 13일 14시 58분


'몸'이 스타일이다
'짐승남' 이병헌 VS '초식남' 장근석의 '착한' 몸 탐구


평범한 셔츠 차림으로도 이병헌이 빛나는 이유는 탄탄한 구릿빛 근육 때문이다. 사진제공 미샤
평범한 셔츠 차림으로도 이병헌이 빛나는 이유는 탄탄한 구릿빛 근육 때문이다. 사진제공 미샤


매주 수, 목요일 밤 여심을 울리는 두 남자가 있다.

오븐에서 갓 구워 낸 듯, 기름 진 구릿빛 복근을 보여주는 이병헌. 그리고 날카로운 스모키 화장에 스키니 팬츠를 입고 야들야들한 몸매를 자랑하는 장근석. 초특급 블록버스터 드라마 '아이리스'와 아이돌 밴드를 소재로 한 트렌디 드라마 '미남이시네요'에서 상반된 매력으로 여성 시청자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남성 연예인들이 뽐내는 최신 스타일의 메가트렌드를 온 몸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메가트렌드란 다름 아닌 '몸'이다. 현재 우리나라 남성 스타들의 메가트렌드는 옷보다 '몸'에 기울어져 있다.

여성 스타들이 올 가을 겨울, 어깨를 으쓱하고 한 번 올린 듯한 '파워 숄더'나 무릎 위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싸이 하이(thigh-high)' 부츠, 굽 높이 10cm 이상의 '킬 힐'로 최신 패션 트렌드를 전달하는 것과 달리 남성 스타들을 통해 유행하는 특정 패션 아이템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올 가을 겨울을 관통하는 컬러 트렌드인 블랙이 드라마 속에서도, 시상식장에서도, 파파라치 컷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는 정도?

그런 가운데 남성 스타들의 벗은 몸, 몸매에 대한 뉴스는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잘 다져진 근육으로 마초적 남성미를 자랑하는 이병헌의 '짐승남' 몸매와 모성애를 자극하나 은근한 섹시미가 있는 장근석의 '초식남' 몸매는 특히 2009년, 대한민국 남성을 규정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정도다.

'수컷의 향기'…'짐승남' 이병헌

KBS의 '아이리스' 방영 초기, 이병헌의 몸은 소재 자체만 놓고 보면 다분히 남성 취향인 이 드라마의 한계를 넘어서서 여성 시청자들을 TV 모니터 앞에 붙들어 두는 역할을 했다.

정준호와 함께 나온 샤워 장면에서 느닷없이 몸을 돌려 초콜릿 복근을 자랑하고, 김태희와의 베드신에서 이두근과 삼두근을 섬세하게 움직이는 테크닉을 선보일 때부터 그 '의도'는 분명했다. 한국 드라마의 주 시청자 층이라는 30~40대 아줌마(그리고 일부 미혼여성)들은 야성적 매력을 뿜어내는 그의 몸매와 '수컷의 향기'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한 대중적 화장품 브랜드의 남성 라인 CF에서 이병헌은 아예 아슬아슬한 톱리스 차림으로 등장했다. 얼굴에 로션하나 발랐을 뿐인데 온 몸에까지 윤기가 잘잘 흐르는 이병헌의 '에지'있는 몸은 그 자체로 아찔한 '전설'이 될 만 했다.

데뷔 이후 줄곧 '얼짱' '몸짱' 스타로 알려진 이병헌이지만 노골적으로 벗은 몸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 놈'에서 할리우드 영화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 '아이리스'에 이르기까지 터프한 매력을 발산해야 하는 역할을 줄지어 맡다 보니 열심히 몸을 만들게 됐고, 이것을 '셀링 포인트'로 내세우게 된 것이라고 그의 소속사 관계자는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KBS 드라마 \'아이리스\'의 한 장면. 이병헌은 이 드라마에서 다양한 몸 노출 씬을 보여준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KBS 드라마 \'아이리스\'의 한 장면. 이병헌은 이 드라마에서 다양한 몸 노출 씬을 보여준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사실 올해 남성 스타들의 최대 스타일 아이콘은 '왕(王)자 근육' 또는 '초컬릿 복근'으로 불리는 '식스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가꿔진 몸은 원초적이고 남성적인 매력을 뿜어내는 '짐승남'으로의 신분 상승을 가능케 했다.

소매 없는 상의를 입고 풋풋한 근육을 흔들며 춤추던 '2PM'에 이어 신인 남성 그룹 '엠블랙', 심지어 이름부터 '성골 짐승남'임을 드러내는 듯한 '비스트(BEAST)'는 가요계 '짐승남' 계보를 이어갔다. 이들에게는 짐승+아이돌이란 의미의 '짐승돌'라는 애칭도 붙었다.

연기자 중에서도 '짐승남' 대열에 합류한 이들이 적지 않다. 이달 말 개봉 예정인 영화 '홍길동의 후예'에 출연한 이범수가 연륜이 깃든 성숙한 복근을 공개했고, '선덕여왕'의 완소 매력남 비담 김남길 역시 마초적 복근을 자랑했다.

남자의 벗은 몸이 '가치 있는 것'으로 추앙받고 예술가의 창의력을 자극하기 시작한 것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일이다.

홍익대 간호섭 교수(패션디자인학)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 포세이돈이 할아버지 얼굴에 화려한 복근을 자랑하는 아이러니컬한 모습으로 전해지는 것은 당시 잘 다듬어진 몸이 곧 권력으로 통했던 데다 심지어 '훌륭한 몸'을 가진 사람이 고귀한 정신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남성만이 참가할 수 있던 고대 올림픽 경기 때 선수들이 모두 '올 누드'로 경기를 펼친 것이나 다비드상과 같은 미술 작품 속에서 헐벗은 남성들이 대거 재현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2009년, 스타들을 통해 재조명되는 남성 몸의 이데올로기는 역사나 철학적 맥락과 닿아있기 보다는 성의 상품화, 상업화와 직결된다.

현대에 접어들어 남성의 벗은 몸이 상품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대표적 인물은 프랑스의 유명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다. 남성용 턱시도 슈트를 변형한 '르 스모킹 팬츠'로 옷을 통한 '여성 해방'에 기여했던 그는 1971년, 35세의 나이에 자신의 이름을 딴 향수 광고에 전라로 출연하면서 '왜 여성들만 누드를 찍어야 하는가'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이후 발매된 남성 향수 '쿠로스', 'M7'의 광고에도 구릿빛 근육질 몸매의 남성들과 그들의 속살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 같은 누드 광고에 동성애적 코드가 숨어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브 생 로랑의 행보는 남성의 몸이 여성의 그것처럼 상업적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증명하는 족적을 남겼다.

한국 드라마에서 남자 배우가 '상업적 가치'가 있는 몸을 내 보인 최초의 작품으로는 1994년 방영된 차인표 주연의 '사랑을 그대 품안에'가 꼽힌다. 간호섭 교수는 "샤워 장면 등 유난히 노출신이 많았던 이 드라마를 통해 차인표는 '몸짱' 스타로 각광받았고 다른 남자 배우들도 이에 자극 받아 '몸'으로 승부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기억했다.

차인표를 '원조'로 봤을 때 이제 불과 15년 남짓 된 '짐승남' 트렌드를 잇는 적자는 역시 이병헌이다. 그가 광고 모델로 활동하는 화장품 브랜드와 남성 정장 브랜드는, 그의 '몸'에 힘입어 각각 상당한 매출 신장 효과를 거뒀다. 특히 7개 제품으로 구성된 화장품 라인은 화장품을 구입하면 함께 주는 이병헌 포스터, 화보형 카탈로그 등 마케팅에 힘입어 2주 만에 일부 제품이 매진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들이 자랑하는 '이병헌 이펙트'는 완벽한 '짐승남' 캐릭터의 경제적 부산물인 셈이다.

몸매가 호리호리한 ‘초식남’ 장근석은 몸에 꼭 맞는 슈트를 잘 소화해낸다. 사진제공 커스텀멜로우
몸매가 호리호리한 ‘초식남’ 장근석은 몸에 꼭 맞는 슈트를 잘 소화해낸다. 사진제공 커스텀멜로우


성의 구분을 넘나드는 '초식남' 장근석

SBS '미남이시네요'에서 아이돌 밴드의 리더 황태경으로 출연 중인 장근석이 최근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입는 옷은 목 부분이 깊게 파인 드레이프 티셔츠다. 아래로 축 늘어지도록 주름이 잡힌 상의 덕에 움직일 때마다 뽀얀 속살과 군살 없이 마른 몸매를 어렵지 않게 감상할 수 있다.

그는 이 드라마에서 비틀즈 멤버들을 연상시키는, 몸에 꼭 맞는 슈트와 폭이 좁은 타이의 '모즈 룩'도 종종 선보였다. 이 드라마에 의상을 지원하는 '커스텀옐로우' 손형오 디자인실장은 "과장되지 않게 멋을 부리는 '초식남'을 스타일 컨셉트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초식남이란 이성에게 마초적인 남성성을 어필하지 않는, 또 자신의 관심 분야와 외모 가꾸기에 적극적인 신인류적 남성상. 국내에서는 KBS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의 조재희(지진희 분), '꽃보다 남자'의 윤지후(김현중) 등이 초식남 계열로 분류된다.

장근석은 '미남이시네요' 방영 이전에도 트렌드세터로 통했다. 초식남적 성향도 일찍이 목격됐다. 각종 시상식에서 남성 스타들은 선뜻 택하지 못하는 모피 목도리를 두르거나, 곱슬곱슬한 단발에 페도라 차림으로 등장하는 등 파격적인 모습을 선보였던 것. 새로운 '인류'의 낯선 행동 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대중은 그의 앞선 패션 감각을 '워스트 패션'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적절히 이용할 줄도 안다. 여자로 치면 가슴과 가슴 사이 '클리비지'가 보일 정도로 푹 파인 셔츠 차림으로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의 시사회장에 등장하기도 했다.
장근석의 스타일리스트 강윤주 실장은 까칠하고 예민한 황태경의 성격을 보다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드라마 촬영 전, 장근석에게 좀 더 살을 뺄 것을 주문했다고 말한다. 현재 그의 허리 사이즈는 겨우 27인치. 강 실장은 "쇄골이 특히 '예쁜' 그의 신체 조건을 고려해 가슴이 많이 파인 드레이프 셔츠를 입게 했다"고 덧붙였다.

SBS 드라마 ‘미남이시네요’ 제작발표회에서 아름다운 가슴선을 내보이며 웃고 있는 장근석. 스포츠동아 자료사진
SBS 드라마 ‘미남이시네요’ 제작발표회에서 아름다운 가슴선을 내보이며 웃고 있는 장근석. 스포츠동아 자료사진


'발리에서 생긴 일'의 조인성, '파리의 연인'의 박신양, '그들이 사는 세상'의 현빈 등 세간에 큰 화제가 된 남성 스타들의 스타일링을 담당한 바 있는 강 실장은 특히 장근석은 패션 실험에 적합한 '도화지' 같다고 말한다. "슬림한 몸매, 패션에 대한 오픈 마인드가 맞물려 여성 패션에 쓰이는 아이템들까지 과감하게 매치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초식남' 트렌드의 발생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2000년대 초반 등장한 '메트로 섹슈얼'을 만날 수 있다. 역시 외모를 꾸미는데 관심이 많아 강력한 소비 집단으로 각광받게 된 이들은 이 무렵 등장한 드라마, 영화 속 캐릭터에도 영향을 끼쳤다.

'메트로 섹슈얼'이라는 신조어가 한국 드라마를 만난 첫 사례로는 '발리에서 생긴 일'을 꼽을 수 있다. 핑크색 꽃무늬 셔츠, 알록달록한 색상의 벨트를 스스럼없이 소화한 주인공 조인성은 당대 최고의 패션 아이콘이 됐다.

남성과 여성의 패션이 접합점을 찾는 시도는 패션 역사상 적지 않은 흔적을 남겼다. 먼저 1960년대 말부터 불어 닥친 '유니섹스(unisex)' 바람은 남녀 패션의 구분을 무색케 했다. 또 1980년대에 시작된 '앤드로지너스(androgynous) 룩'은 '남녀양성의' '자웅동체의'란 사전적 의미처럼 여성이 남성 옷을 입고 여성이 남성의 옷을 입는 '크로스오버' 스타일을 보여줬다.

남성 버전의 '앤드로지너스 룩'을 대표하는 스타일이 메이크업한 얼굴, 긴 머리, 드레이프임을 고려해 볼 때 블랙 아이라인이 돋보이는 메이크업에, 사과처럼 말아 올린 머리, 드레이프 티셔츠 차림의 장근석 스타일도 '앤드로지너스' '크로스오버' 트렌드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장근석이 보여주는 '초식남'은 형님뻘인 '메트로섹슈얼' '크로스 섹슈얼'과 차이점이 있다. '커스텀멜로우' 손형오 디자인실장은 "크로스 섹슈얼, 메트로 섹슈얼 스타일이 동성애와 연관돼 해석되는 경우가 많았다면, '초식남'은 이러한 성적인 취향이 배제된, 섬세한 취향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2009년 대한민국 남성의 스타일 트렌드를 이끌게 된 '짐승남' '초식남'의 공통점은 남성의 '몸'이 상업적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는 점이다.

간호섭 교수는 "남성 몸의 상품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이를 드러내놓고 소비하고 향유할 만큼 현대 여성의 경제력과 권력이 세졌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또 근육질과 '꽃남'형 몸매라는 상반된 이미지에 공평하게 환호할 수 있는 것은 여성에게는 귀엽고 예쁜 연하남을 보듬고 싶어 하는 모성애적 본능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터프하게 이끌어줄 마초적 남성에게 의지하고 싶은 수동성이 공존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소비의 시대인 현대 여성은 이러한 욕구를 하나가 아닌 다양한 대상을 통해 충족하려 한다.

현대 여성이라고 '아내가 결혼했다'의 주인공 주인아처럼 두 명의 남편과 함께 사는 발칙한 상상력을 실천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서른 한 가지 맛 아이스크림 가게와 수 만 가지 물건을 한 자리에서 파는 인터넷 쇼핑몰에 길들여진 이들은 선택의 폭은 넓을수록 좋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간파하고 있다.

'고기'도 '야채'도 편식하지 않고 소화해 내며 '골라 먹는 재미'를 추구하는 이들이 지조도 없이 오늘은 '짐승남'에, 내일은 '초식남'에 열광하는 이유다.

김현진 동아일보 주간동아팀 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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