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귀 이후 그 연기활동의 정점을 이루는 <패션 70s> <화려한 휴가> <선덕여왕>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작가와 감독, 아니 세상이 원하는 그의 역할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첫 째는 주인공이 배우가 아닌 거대한 역사의 물결이라는 것. 섬마을 평범한 소녀가 화려한 패션시장에 만든 운명의 씨앗은 6.25라는 비극에서 탄생했다. 5.18이란 배경은 그의 사랑을 저 세상으로 앗아가고, 심지어 유약한 그를 지프차에 태우고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고 소리치게 만든다.
둘째는 주어진 환경에 굴하지 않는 무한히 성장하는 캐릭터라는 것. 그 배경에는 타고난 '밝음'의 이미지가 존재한다. 롤플레잉(RPG) 게임이란 장르가 있다. 게이머가 새로운 환경에서 능력치를 키워 종국에는 완벽한 존재에 이르는 이른바 온라인 셀프 성장소설이다. 그에게는 RPG게임 캐릭터의 분위기가 풍긴다. 마치 덕만이 선덕여왕에 이르는 길처럼 그의 성장과정은 우여곡절을 겪지만 필연으로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피할 수 없는 비극적 운명. 덕만이란 캐릭터 역시 언니 천명을 잃고 사랑(유신, 비담)과는 절대 이뤄지지 못하는 비련의 여인이다. 묘하게도 이요원의 사랑은 극중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일찍 결혼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는지도 모른다.
맥 락은 조금 다르지만 2007년 <외과의사 봉달희>의 봉달희도 정의감을 지닌 여의사가 고군분투하는 모습으로 이 같은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심지가 굳고 통이 크면서도 누가봐도 선한 사람이라는 넘볼 수 없는 '아우라'가 바로 그것이다.
물 론 실패작도 있다. <광식이 동생 광태>가 그것이다. 흥행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요원의 매력을 제대로 뽑아내지 못한 배역이었다. 광식이가 짝사랑하는 '윤경'은 위에 열거한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말 그대로 지극히 현실적인 여성이었다. 결국 대중은 김아중의 섹시한 모습만을 기억하고 말았다.
▶ 선덕여왕에서 보인 덕만의 매력
"이 작품의 시놉시스를 보고 마치 '운명'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선덕여왕 출연 직후)
그 는 이제껏 특정 배역을 따내기 위해 굳이 노력을 한 것 같지 않다. 오히려 그의 표현대로 '운명'의 냄새가 풍긴다. 그것이 꼭 정치권력이 아니라 가정권력이든, 남녀 사랑 간 주도권의 문제이든 그에게 풍겼던 운명적인 느낌이 이번 <선덕여왕>에 투사된다.
선덕여왕은 이요원의 인생에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전망이다. 그가 가진 거의 전부를 이 작품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배우 이요원'이 가진 매력들의 백화점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그의 투쟁도 만만치 않았다.
<선덕여왕> 제작진 한 관계자는 "이요원이 아역이 끝나는 8회부터 대사가 주어졌지만 그 전에 이미 덕만의 대사를 달달 외우고 있었다"며 "그래야만 극중 덕만의 캐릭터가 연속성을 지닐 것 같아서 그랬다는 답을 들었다"고 놀라워했다.
가냘픈 몸으로 남장배역을 소화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고충이었다. 그러나 그의 화랑 연기는 이전의 보이시한 배역의 연장선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고 시청자들도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가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끊임없이 저항세력을 불러 오는 것도 극중이나 현실이나 매한가지라는 점이 흥밋거리다.
그 의 배역의 적합성을 놓고 논란이 일자 <선덕여왕> 제작진이 나서 그를 옹호했다는 것 또한 그의 비극적 요소와 운명론적인 승리를 예감케 하는 대목이다. 이는 마치 <패션 70s> 정성희 작가가 나서 "이요원 만큼 (섬처녀) 더미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배우는 없다"고 단언했던 상황과 비슷하다.
"이요원의 연기력이 문제라고요? 고현정의 20대 시절 연기와 지금 이요원의 연기를 비교해 보세요. 이요원만큼 연기력의 성장이 빠르고 존재감 있는 배우를 찾을 수 없습니다. 먼 훗날 이요원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기자로 성장하리라 확신합니다."(스포츠동아 김재범 엔터테인먼트부장)
▶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닮은 선덕여왕
<선덕여왕> 이후 그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권 력을 장악하는 여제를 그린 선덕여왕의 효과로 향후 제 1공화국, 제 3공화국, 제 5공화국 등 기존 한국정치드라마에 이은 현대정치사 드라마가 나온다면 여성 정치인을 연기할 후보연기자 1순위가 아닐까. 어찌됐건 그는 여성의 정치권력 이미지를 획득했으니 말이다.
이요원을 수식하는 표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 해봐야 '포스트 심은하'가 잠시 떠돌다 사라졌다. 그만큼 그의 이미지는 독보적이고 비교 불가능한 새로운 것이다.
이요원의 이미지에는 본인이 원하든 아니든 젊은 여성이 지니는 발랄함보다는 '운명적' 비극의 요소가 담겼다. 그와 닮은 캐릭터를 찾던 중 일본 애니메니션의 거장 미아자키 하야오의 초기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떠올렸다.
바람계곡의 공주로 태어난 나우시카. 자신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조건이다. 이런 그는 그 어떤 가식적 귄위나 폭압적 권력도 거부하며 태생적 선함의 상징이자 비극을 거부하지 않는 인물이다. 제국의 폭압에 맞선 나우시카는 희생을 통해 왕국은 물론 세상을 구원한다.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온 예언대로 말이다.
지금도 <선덕여왕> 최고의 명작면으로 꼽히는 일식 예언 장면.
태양이 머금었던 달을 토해내며 그 최초의 빛을 지상에 내린 순간 그 자리에는 씩씩하면서도 한없이 선한 이미지의 덕만 공주가 서 있었다. 백성들은 그에게 경배하고, 이를 바라본 미실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워져 간다.
우리는 어쩌면 예언서에 적혀있는 '나우시카'와 같은 <토함계곡의 덕만공주>를 시청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운명에는 우연이 없다. 인간은 어떤 운명을 만나기 전에 벌써 제 스스로 그것을 만들고 있다" (T.W.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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