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얼마나 사려 깊고 세심한 사람인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일주일 간 10시간을 잔다는 그는 따로 인터뷰 시간을 뺄 수 없다고 했다. 고민 끝에 그는 금요일 저녁 스태프들과 저녁 먹는 자리에 동석해 인터뷰를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시간은 저녁 7시였다.
11월 20일 경기도 일산 MBC 드라마센터 1층 로비에 일찌감치 도착해 그를 기다렸다. 저녁 6시35분쯤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올해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김병욱 PD였다.
"이거 어쩌죠? 저녁 식사가 한 시간 앞당겨졌어요. 7시에는 무조건 촬영에 들어가야 해요. 더 빨리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연락처를 몰라서…."
일주일에 5편의 드라마를 제작 방영하는 살인적인 일정의 일일시트콤 총지휘자 치고는 너무나 자상했다. 부리나케 뛰어 내려온 그는 한 번 더 기자를 놀라게 했다. 갑자기 일정이 앞당겨지자 기자와의 통화를 위해 동아일보에 전화를 걸었고, 수차례 전화 돌리기를 감내한 끝에 겨우 연락처를 알아냈다는 것이다.
▶ 시트콤 거장의 세심한 배려
- 2007년 '거침없이 하이킥' 때도, 그리고 '똑바로 살아라(2003년)' 시절에도 열혈 시청자였고 그래서 꼭 인터뷰 하고 싶었습니다. 우선 시청률 20%를 넘겨 기분이 좋을 것 같은데요.
"(웃음) 물론 좋긴 해요. 그런데 그보다는 좋은 드라마로 남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략 시청률 15% 정도가 나오면 방송사에서 관여 안할 수준이 되거든요. 물론 그 이상으로 나오면 좋긴 한데, 그게 사람 욕심으로 될 일은 아니고, 처음 15% 나왔을 때(11월 초) 많이 행복했어요. 목표가 너무 빨리 나와서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 방송 시간이 7시45분인데 불리한 시간인가요?
"아니, 나쁘지 않아요. 지금이 딱 좋다고 생각합니다."
- 시청률은 높은데 '거침없이' 때와는 양상이 조금 다릅니다. '거침없이'는 초반 시청률이 10% 언저리였지만 온라인에서 영향력은 막강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시청률은 높게 나오지만 이슈 창출은 상대적으로 덜 한 것 같아요.
"음. 꼭 그렇지는 않아요. 이번 작품도 인터넷상의 반응은 높은 편이에요. '빵꾸똥꼬'가 대표적이고. 그런데 전작에 비해 그럴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워낙 현실의 문제가 첨예하고 '하이킥'이란 주제가 익숙해졌으니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는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1993년 'LA아리랑'을 시작으로 '똑바로 살아라' '귀엽거나 미치거나' '순풍산부인과' '거침없이 하이킥' 등 무려 1400편의 일일 시트콤을 제작한 장인 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순박한 표정과 어투로 상대를 제압하고 있었다. - 전작에서 이름을 따 '지붕 뚫고 하이킥'으로 정했는데, 덕분에 '하이킥 월드'라는 표현까지 생겼습니다.
"하이킥은 제가 가장 마음에 드는 제목이에요. 그래서 '시즌2'가 아닌데도 다시 쓰게 됐어요. '하이킥 월드'란 좋은 평가인지는 알겠는데, 실제 (새로운) 세계까지는 아니지 않을까요? 앞으로 한 번 더 할 생각도 전혀 없고요."
▶ '쿨'한 코미디가 아닌 '핫'한 드라마다 - '하이킥 월드'는 이전의 김병욱표 작품들과는 궤가 다릅니다. 스스로도 '쿨(cool)에서 핫(hot)으로'라는 표현을 썼고 실제 전형적인 상황극보다는 드라마적인 스토리텔링 요소들이 자주 등장하거든요. 의도적인 변신인가요? 혹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걸까요?
"지금 이 작품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에요. 남성용 코미디가 아닌 것 같긴 해요. 오히려 여성용 드라마에 근접했을 수도 있고요. 제가 변했다는 것은 실제 이전에 제가 주로 했던 장기 가운데 어떤 것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데…. 제 스스로는 깊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마치 대중들은 '변해서 싫다'라고 말할 수도 있는 거죠. 실제 '똑바로 살아라' 시절의 제 코미디를 좋아한 사람들이 그런 말을 자주 해요. 저도 인간인지라 대중이 좋아하는 것만 하지는 않겠죠."
- 이전 김병욱 작품의 완결판이면서도 새로움을 추구한 결과라는 거죠?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라도 일일드라마로 생각하지 정통 시트콤으로 생각할 수 없겠죠. 그런데 지금 제게는 이 형식이 제일 편안하고 만족을 주고 있어요. 아니면 제 성향이 변한 것이라면 변한걸까요?"
- 전작 하이킥을 끝내고 작품 구상을 하면서 영향을 받은 작품이나 목표한 바가 있다면.
"나이가 들다보니 본인의 내면을 응시하게 될 때가 많아졌어요. 지난 2년은 아마도 그런 시간이었던 듯합니다. 제가 연출을 할 수 있는 날이 별로 안 남았고, 더 이상 시트콤을 만들어 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거나 그렇게 절박하지 않게 됐거든요(웃음). 배가 불렀다기 보다는 이제는 돈이나 명예보다는 조금 구차하더라도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꿈을 꾸는거죠(웃음)."
▶ "정치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사회 모습은 전달하고 싶다"
- 상황은 코믹 하지만 설정 자체는 언제나 첨예합니다. 드라마에 식모, 아니 가사도우미로 등장하는 세경이가 그런데요. 사실 가사도우미가 주요 배역이라는 것은 낯선 시도지만 전작 '귀엽거나 미치거나'에서도 가사도우미가 등장한 적이 있고 사용자와 고용자, 심지어 사장과 재벌까지 등장합니다. 풍자를 해보겠다는 욕심인거죠?
"저는 정치적 의도가 없는 사람이에요. 실제 정치의식도 없어요. 그런데 제 작품에 사회의 모습을 제대로 담고 싶은 생각을 합니다. 저를 포함해 누구나가 시트콤이란 게 단순히 피로를 잊고 웃으면서 끝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잖아요. 그러나 은연중에 제가 사회를 바라보는 제 시각이 들어가 있겠죠. 그 것을 피할 생각은 없거든요." - 실제 본인은 중산층 이상 아닌가요?
"그렇죠. 따지고 보면 저는 그런 얘기를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일 수 있어요. 왜냐면 시트콤 연출을 하면서 돈도 많이 벌었고, 좌파 우파에도 관심이 없고…. 그러나 마음은 항상 '마이너리티'로 살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마이너에 속한 사람들 얘기를 더 하고 싶었을지 모르죠."
- 이번 캐스팅 다 마음에 드는지….
"100%는 아니에요. 일부는 잘못 택한 것 같기도 해요."
- 지금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는 누구인가요?
"(웃음) 그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오해를 부를 수가 있어요. 사실 연기자들이 굉장히 민감하시거든요."
-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악한 것은 여전하더라고요. 성악설(性惡說) 추종자처럼 매번 그렇습니다.
"악하다고요? 보기보다 어른스럽고 계산적으로 그려지긴 하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데, 아이들이 선하다고 믿지는 않는 편이에요."
▶ 3시간 촬영으로 단 5분 건져…이거 시트콤 맞아?
촬영이 시작되는 7시 드라마 제작 지휘가 이뤄지는 부조종실로 그를 따라 들어갔다. 촬영은 목금토 2박3일간 5일분(125분) 분량을 찍는다. 총괄 PD는 이곳에서 마치 항공기 관제사와 같이 드라마 세트장에서 이뤄지는 모든 촬영을 감독한다.
3시간 동안 그의 뒤에 숨죽이고 앉아 3개의 장면을 촬영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시트콤이란 일상적 상황을 유머러스한 형식으로 다루는 방송의 한 장르가 아니던가. 배경은 대부분 고정돼 있고 배우들의 연기 의존도가 크기 때문에 한동안 방청객을 앞에 두고 촬영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김병욱표' 시트콤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드라마에 필적하는 종합 예술로 변신해 있었다. 한 단역 배우는 '아버지'를 '아버님'이라 불러 7번 NG를 냈고. 화면에 덧입히는 방귀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수차례 NG가 났다.
때론 화면에 자막과 CG를 입혔고 성우의 특별 녹음까지 상시적으로 따라 붙었다. 시트콤이라지만 야외 촬영분도 전체 분량의 절반에 가까웠다. 김PD는 3시간 동안 단 한순간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3개 장면의 촬영을 꼼꼼하게 지도하며 시트콤의 완성도를 세밀하게 조율했다.
50여명의 스태프와 출연진들이 3시간 협업작업을 통해 이뤄낸 촬영분량은 고작 5분 내외. 그의 완벽주의는 빈틈을 찾기 힘들었다. 그가 왜 시트콤 방영 기간 내내 극심한 수면 부족과 체력저하를 호소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촬영이 끝난 뒤 숨을 돌리고 다시 인터뷰를 이어갔다. - 지금도 대본을 모두 쓰시나요?
"세간에 너무 그렇게 알려져서 어색한데…, 그건 불가능하죠. 녹화와 촬영도 해야 하는데요. 대본 회의를 하며 제 생각을 많이 얘기할 뿐이죠. 엄밀하게 공동창작입니다. 다만 제가 추구하는 뚜렷한 방향 있다는 정도겠죠."
▶ "황정음의 연기 대단히 만족한다"
- 개인적으로 여주인공 황정음씨 연기가 몰입이 안돼 힘들었는데 이 곳에서 3시간을 지켜보니 연기를 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실제로 잘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이 대목에서 대단히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 그렇다면 어떤 연기자가 연기를 잘하는 걸까요? 감독의 의도 파악이 중요한가요?
"제일 중요한 질문인데, 딱 집어 말하자면 상반신이 잡히는 '바스트 샷'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화면 안에 혼자 나와 어떤 이야기를 전달해야 할 상황인거죠. 그 순간 그 화면에 지지 않는 사람, 그런 배우가 연기를 잘하는 거겠죠. 그건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 시트콤은 미시사를 주로 다루지 않습니까. 때문에 일상적으로 밥 먹는 얘기나 심지어 가족간에 방귀를 뀌고 싸우는 얘기까지 등장 합니다. 감독께서는 일상에서 행복하면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네. 저는 그렇습니다. 일상에서의 행복이 너무 중요합니다. 누군가는 저를 일본의 '오즈 야스지로'와 비교하기도 하더군요. 일상성의 행복을 추구하는 작가로 분류해서 말이죠. 우선 아무리 블록버스터급 영화라도 출발은 인간의 관계와 심리에서 나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 관계가 없으면 껍데기에 불과하죠. 집이란 아주 갈등하기 좋은 장소죠. 부딪힐 일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그랬어요. 제 작품이 대박이 나건 실패를 하건 그것이 제 행복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2005년작 '귀엽거나 미치거나'가 제가 유일하게 망한 작품이었어요. 이후 장기간 여행을 갔지요. 염전에 가서 일도 하고 제 고향도 다시 둘러보고 그랬습니다. 제 내면을 응시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제일 행복했던 순간이었어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제 PD인생이 끝날 수도 있던 순간이거든요.
반대로 2007년 '하이킥'은 생애 최대 히트 작품이었죠. 그런데 실제로는 매일 같이 전쟁이었고 서글펐어요. 시청자들이 하이킥을 보면서 첨예하게 대립했거든요. 당시 극중 러브라인 4, 5개를 놓고 서로 편을 갈라서 싸움을 해댔어요. 물론 좌우대립까지는 아니지만 사소한 것을 놓고 싸우는 우리 사회의 병증을 목도한 것 같았어요. 작품의 본질과 아무 관계없는 이전투구에 이런 사람들을 상대로 프로그램 만들어야 하는지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불행했어요."
▶ "시트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작고 평화로운 이야기가 좋다"
"일상적인 행복이 최종적인 만족을 주냐고요? 그렇지 않으면 재벌이나 권력자들은 왜 자살할까요?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런 작은 이야기들이 좋아요. 시트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작은 얘기들…. 저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가 넘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요. 오히려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같은 아무 얘기가 없는 작품에 눈물을 흘려요. 무덤덤한 영화. 어제가 오늘 같은 영화, 어제 먹은 밥을 오늘 또 먹는 것 같은 심심한 작품. 나이가 들수록 그런 평화를 꿈꾸게 되네요." - 미국 시트콤이 국내에서 유행하고 '하이킥'은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습니다. 시트콤은 보편성을 가진 장르라고 보세요?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미국은 화장실 유머에서부터 조금은 사회적 유머에 이르기까지 유머 그 자체를 즐길 규모가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실제 코미디 보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 자체를 좋아해요. 그래서 저는 시트콤이 우리에게 적합한 장르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고 보니 최근에 미국에서 인기 있던 '빅뱅 이론'을 아주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나네요. 정말 즐거웠는데 따라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더군요."
다시 촬영이 시작됐다. 3시간을 또 기다려 그와 인터뷰를 이어 가고 싶었지만 이번 촬영은 새벽 1시에 끝날지 5시에 끝날지 모른다며 난처해했다. 집으로 돌아와 주말에 하이킥 재방송을 보았다. 손으로 한 땀 한 땀 수놓듯 섬세하고 치밀한 제작 현장을 목격하고 나서인지 이날 감동은 배가 됐다. [O2/커버스토리] 웰컴투더 하이킥 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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