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속은 요지경 세상이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되지 않고, 사람이 개를 물어야 뉴스가 된다. 복수와 불륜, 악다구니와 말도 안 되는 설정이 연속되는 이른바 막장드라마는 욕하면서도 보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런 와중에도 '리얼' 버라이어티 왕국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리얼'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출연자들을 '비현실적' 실제 상황에 몰아넣고 출연자들의 리얼한 반응을 관음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폭소를 터트린다.
'미실'의 말처럼 사실 대중들은 리얼한 것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중들에게 리얼, 현실, 일상이란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리얼 버라이어티가 정말 리얼하다면 대중들은 아마도 차갑게 외면해 버릴 것이다.
'일상성'. 대중들이 늘 외면해 버리려는 이 일상성을 통해 오히려 웃음과 감동을 추구하는 것이 '지붕 뚫고 하이킥' 김병욱 PD의 야심이다.
▶ 언제나 야심찬 김병욱의 '하이킥 월드'
김병욱 PD는 '김병욱 표 시트콤'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낸 스타 PD다. '지붕 뚫고 하이킥' '순풍 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거침없이 하이킥'이 이 브랜드의 제품들이다. 리얼 버라이어티와 막장 드라마가 대세인 지금 그가 시트콤을 통해 풀어내려는 '일상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실 시트콤이라는 장르(시트콤은 시츄에이션 코미디의 약자이다)는 비현실적 공간을 설정해놓고 그 속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구조를 띤다. 시트콤의 대명사인 미국의 '프랜즈'는 6명의 친구들이 한 집에 모여 있는 비현실적 공간을, '지붕 뚫고 하이킥'은 부잣집 가족과 그 집에서 일하는 식모 자매 그리고 교감이 운영하는 하숙집이라는 역시 비현실적 공간을 설정했다.
이 비현실적 공간으로 시청자들을 불러들인 후 통제된 상태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비현실적 공간 속에서 '지붕 뚫고 하이킥'은 상황과 캐릭터 그리고 그들 간의 관계를 통해 일상성을 드러낸다. 몇 개의 장면들을 살펴보자.
#장면 1. 교감 선생님인 자옥은 차분하고 교양 있는 말투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그녀의 별명은 '변태교감'. 학교에서 벌로 남학생들의 젖꼭지를 꼬집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결국 그녀는 너무 심하게 꼬집은 나머지 '세호'의 젖꼭지를 떨어지게 하고 각종 학부모단체와 교육청에 사과를 하러 다니게 된다.
#장면 2. 해리는 화장실에서 얼굴이 뻘게지도록 용을 쓴다. 엄마인 현경은 밖에서 힘내라고 주먹을 불끈 쥐고 응원 아닌 응원을 보낸다. 막무가내 성격으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빵꾸똥꾸"를 외치는 부잣집 막내 손녀. 해리의 고질병은 변비이고 변비의 원인은 부잣집 아이답게 갈비를 너무 먹어서이다.
▶ 인간관계의 본질을 묻는 심각한 시츄에이션
이처럼 하이킥이 설정한 상황들은 매우 섬세한 눈으로 관찰할 때에만 발견할 수 있는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다. 어디선가 볼 수 있었던, 하지만 잊고 있었던 장면의 본질들. 그 본질들을 대중들에게 툭 던져놓는 방식이 '하이킥'의 첫 번째 매력이다.
학교에서의 체벌, 종종 일어나는 교사들의 어이없는 반응들이 녹아있고, 가정환경과 식생활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에까지 촉수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섬세한 관찰의 미덕은 대중들의 쉬운 공감 그리고 공감이 불러일으키는 몰입이다.
'하이킥'의 두번째 매력은 관계,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권력관계의 역전이다. 통쾌한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오래되고 기본적인 원칙인 권력관계의 역전은 '하이킥'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것도 현실적이지만 어이없는 상황과 만나 더욱 빛나게 된다.
아이들은 종종 너무 잔인하고 때로는 너무 현실적이다. 해리와 신애의 관계는 어찌 보면 어른들의 권력관계보다 더 적나라한 단면을 보여준다. 부잣집 막내 손녀 해리는 식모의 동생인 동갑내기 신애를 괴롭힌다. 신애가 갖고 있는 것은 모두 뺏고, 신애의 처지를 조롱하고 누명을 씌울 생각도 종종 한다.
하지만 신애 역시 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신애는 착하고 주눅 들어 있지만 가끔은 자신의 착한 이미지를 역으로 이용해 해리를 골탕 먹인다. 해리가 가장 좋아하는 인형을 몰래 숨겨두었다가 자신이 범인으로 밝혀지기 직전에 인형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 신애와 해리의 관계는 역전되기도 한다. 신애는 해리의 변비에 착안을 해 '애기똥' 동화를 지어내고, 이 동화에 흠뻑 빠져버린 해리는 신애가 해야 할 집안 허드렛일을 대신하며 빨리 동화를 더 만들어달라고 애원한다.
'하이킥'에 콩쥐팥쥐의 신화는 없다. 콩쥐가 신분상승을 통해 행복을 찾는 권선징악의 간접적 방식보다는 직접적 권력관계의 역전이 주는 웃음이 '하이킥'이 추구하는 바이다.
▶ 인간관계의 전복, 그리고 치열한 현실
관계의 역전만이 아니라 캐릭터가 갖는 이중성 또한 재미를 주는 요소 중 하나다. 하숙집을 운영하는 자옥은 교감이라는 신분과 그에 걸맞은 교양을 가진 캐릭터. 하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어쩔 수 없는 속물근성이 존재한다.
자옥은 하숙집의 문제아 광수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고결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 위해 광수에게 하숙료 인상을 자발적으로 선동하게 하는 것. 평소에도 미워보이던 광수가 이 선동에 실패하자 광수의 하숙료만 올리겠다고 닦달을 하는 모습은 '하이킥' 에피소드 중 압권이라 할 것이다.
'하이킥'은 색깔 있는 캐릭터들의 조합, 현실적 상황설정, 관계의 역전이 주는 웃음 그리고 김병욱이라는 브랜드가 합쳐져 비교적 빠르게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시트콤으로서 시도하기 힘든 가슴 찡한 에피소드들까지 소화하고 있으니 금상첨화. 하지만 몇 가지 아쉬움과 불안감도 있다.
아쉬움은 반복에 기인한다. 우선은 캐릭터 배치의 반복이다. 김병욱의 전작들에 나왔던 괴팍한 할아버지와 무능한 남편, 까칠한 부인 그리고 말썽쟁이지만 속 깊은 아들. 가족을 구성하는 네 명의 캐릭터가 반복되고 있다. 주변 캐릭터들의 변화는 있지만 중심 캐릭터 구조가 변하지 않아 아쉬운 것이다.
또 다른 아쉬움은 반복적 대사와 상황을 통한 웃음 유발이다. 사실 이 방식은 시청자들의 웃음을 쉽게 만들어낼 수 있어 흔히 사용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반복에 의한 웃음은 유쾌한 웃음이라기보다는 강요된 웃음이라는 점에서 독이 될 수도 있다.
▶ 그럼에도 아쉬운 김병욱의 한계
불안감은 강박에서 온다. 시청률과 웃음에 대한 강박은 시트콤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 강박으로 인해 하이킥의 잘 짜여진 구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란다. 이러한 강박의 징후는 아이러니하게도 하이킥을 통해 떠오른 세경과 정음에게 나타난다. 세경과 정음을 둘러싼 러브라인은 시청률을 책임지는 중요한 수단일 것이다.
이미 디씨인사이드의 하이킥 갤러리에 가면 지세(지훈과 세경)라인, 준세(준혁과 세경)라인 등 러브라인을 둘러싸고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다. 러브라인을 또 하나의 에너지로 가져가는 것은 당연하나 그 에너지가 넘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세경과 정음에게 부여된 또 하나의 코드인 섹시함은 좀 아슬아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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