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에서 가장 흔한 장르는 무엇일까? 2009년 현재를 기준으로 삼으면 '수사물'이 정답일 것 같다. '과학수사'로 새로운 수사물의 지평을 연 'CSI: 라스베가스'가 시즌 10을 맞는 장수물의 대열에 들어서는 동안, '형사 콜롬보'의 뒤를 잇는 '몽크', 뼈에서 단서를 발견해 살인사건을 푸는 '본즈', 낸시 드류보다 깜찍하고 영민한 여고생 탐정을 내세운 '베로니카 마스', 반복되는 범인의 행동 패턴을 통해 프로파일을 작성하는 '크리미널 마인즈', 수학을 사건 해결에 적용하는 '넘버스' 등 수사물 장르는 누가 더 특이한 분야를 범죄 수사에 접목시키는가를 다투어왔다.
▶미드 수사물에 불어오는 차별화 바람: 짝패를 찾아라
하지만 2008년 들어서면서 그 판도는 조금 달라졌다. 수사물이야 여전히 인기만점의 장르이지만, 지난해부터 출발해 성공적으로 시즌2의 궤도로 접어든 수사물과 2009년 가을 새롭게 출발한 수사물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적인 요소가 보이기 때문이다. 사건의 실마리를 좇는 주체가 더 이상 경찰력 혹은 법 집행기관의 인력에 집중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사기관의 인력과 외부인의 공조를 메인 관계로 드러내는 것이 요즘의 트렌드라면 트렌드일까?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사이먼 베이커가 특유의 눈웃음과 의뭉스러운 표정을 던지며 출연하는 '멘탈리스트'는 (사실 무슨 직업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인트 컨트롤러'가 경찰과 협력하는 구조이고, '캐슬'은 미스터리 소설작가가 영감을 얻기 위해 수사에 참여하는 구조다. 그리고 이번에 이야기할 미국 케이블 채널 USA의 '화이트 칼라'는 화이트 칼라(White Collar) 전담반의 노련한 FBI요원 피터 버크(팀 드케이)가 예술품 위조범 닐 카프리(매튜 보머)와 짝패가 되어 머리 좀 쓰는 사람들의 사기가 주를 이루는, 이른바 '화이트 칼라 범죄'를 해결해 나간다.
형사와 소설가, 형사와 멘탈리스트, FBI요원과 예술품 위조범 등 다양한 각을 이루는 새로운 짝짓기에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남녀관계가 아니더라도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과 화학작용이 바로 시리즈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라는 것. 그리고 두 캐릭터 모두 매력적이지만, 보통은 외부인물 쪽이 거부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이라는 점이다. 그 점에서는 '화이트 칼라'의 닐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닐이 눈만 한번 찡긋해도 세상이 바뀔 정도. 허름한 셔츠와 면바지를 사이 드보어의 클래식 수트로 갈아 입혀줄 미망인을 만날 기회 역시 매력이 철철 넘치는 닐에게는 일상다반사일 뿐이다.
▶전직은 사기꾼, 어제는 탈옥수, 오늘은 FBI 컨설턴트
'화이트 칼라'의 첫 장면은 닐이 탈옥하는 장면이다. 대담하게도 인터넷으로 교도관용 유니폼을 주문한 닐은 몇 달 동안 기른 수염을 말끔히 면도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교도소 정문을 통해 나간다. 그 뒤부터는 일사천리다. 훔친 트럭으로 공항까지 간 닐은 장기주차하는 럭셔리 오픈카를 훔쳐 타고는 사라진다. 3년이나 닐의 사기를 추적하고서야 겨우 닐을 잡아 넣었던, 그래서 걸음걸이, 버릇, 기상시간까지 꿰차고 있던 버크는 유령선처럼 다가서면 사라지는 위조전문가 '더치맨'을 추적하다가 교도소로 불려가 닐의 뒤를 뒤쫓는다.
버크가 닐의 소재를 알아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닐이 출소를 겨우 4개월 남기고 탈옥했다는 점을 이상하게 여긴 버크는 닐의 여자친구인 케이트가 마지막으로 면회 온 날부터 그가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낸다. 버크는 케이트의 아파트로 찾아가고, 텅 빈 아파트에서 빈 와인병을 든 닐을 찾아낸다. 그런데 감옥으로 돌아가려는 닐이 버크의 수트에 묻은 섬유를 떼어내면서 말했다. "이게 뭔지 말해주면, 면회 한번 올 건가요? 한 번이면 되요."
그렇게 전직 사기꾼과 FBI 요원의 이상한 팀은 만들어진다. 옷에 묻은 섬유가 캐나다 신권용지에 사용될 위조방지용 섬유라는 것을 알려준 닐은 범죄 수사를 도와주는 대신에 감옥이 아니라 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게 해줄 것을 거래한다. 사기꾼의 두뇌와 경찰력을 이용해 화이트칼라 범죄를 해결하자는 것. 타고난 닐의 매력 때문인지, 아니면 범죄자를 잡으려면 범죄자처럼 생각하라는 손자병법스러운 솔루션이 맘에 들었는지는 몰라도, 닐은 감옥에서 벗어나 발목에 GPS가 달린 발찌를 차고 한달에 700달러짜리 허름한 모텔에서 버크의 수사를 돕는 "FBI 자문"으로 급격히 신분상승한다.
▶21세기 TV로 찾아온 '탱고와 캐쉬'
드라마가 시리즈물의 구조를 가지려면 독립적인 사건들이 에피소드마다 새롭게 나타나야 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보다도 시리즈를 시리즈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 기둥줄거리 격의 이야기다. '화이트 칼라'의 기둥은 닐이 사라진 여자친구 케이트의 뒤를 추적하는 것이다. 처음엔 실연으로 보였던 케이트의 잠적은 매회 새로운 실마리를 드러내고, 곧 케이트가 마지막으로 찾아왔던 날 암호를 통해서 닐에게 '어떤 진실'을 전달하려고 했음이 밝혀진다. 그리고 버크는 닐에게 케이트를 찾을 생각도 하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그 역시 감시의 눈길을 풀지 않는다. 한잔에 800달러를 웃도는 와인 빈병을 놓고 떠나간 옛사랑의 그림자는 '화이트 칼라'의 에피소드들을 이어주는 접착제다.
닐의 애틋한 사랑이 시리즈의 연결에 한몫 한다면, 그 구심점에는 닐과 버크라는 수상한 관계가 놓인다. 영화 '탱고와 캐쉬'를 보는 듯한 두 사람의 호흡은 그야말로 찰떡궁합. '화이트 칼라'의 매력은 예상을 뒤엎는 닐의 행동과 아등바등 그 뒤를 수습하는 버크의 캐릭터에 크게 빚진다. 다른 사람 등쳐먹는 일보다는 고상하지만 어쨌든 사기꾼인 닐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범죄해결에 다가선다. 영장이 없어 들어가지 못하는 창고 앞에서 일부러 얼쩡거리다가 끌려간다던지, 파티광인 용의자를 잡으려고 왁자지껄한 파티를 연다던지, FBI라면 생각지도 못할 아이디어를 속속 내놓는다.
그리고 닐은 그 과정에서 버크를 어르고 달래고, 애 태우고 화도 돋운다(거의 연애관계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버크가 멍청하고 아둔한 경찰은 아니다. 윽박지르지도 무시하지도 않으면서 닐을 교묘하게 조종하는 법을 알고 있다. 닐이 케이트를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을 버크가 가지고 있고, 그래서 버크는 "사건 해결"을 조건으로 닐과 매번 작은 거래를 한다. 결국 '화이트 칼라'는 서로를 파악했다고 착각한 두 남자의 짝패극이다. 다른 듯 닮은 두 캐릭터가 만들어내는 화음이 때로 소음일 때도 있지만 그마저도 짤랑짤랑 어찌나 신이 나는지 시선을 거둘 수 없다.
▶익숙한 듯 신선한 캐스팅, 그리고 뉴욕
미드 좀 보았다 하는 사람이라면 '화이트 칼라'의 캐스팅에서 지나간 다른 드라마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카니발'에서 절름발이 '존시' 역을 통해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던 팀 드케이와 '트루 콜링' '트래블러' 등 청춘물에서 꽃남으로서 빼어난 미모를 소비해오던 매튜 보머, 그리고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의 게이 친구였던 '스탠포드'를 연기한 윌리 가슨 등 익숙한 얼굴의 향연이 펼쳐진다. 심지어 파일럿에 '더치맨'으로 출연한 마크 셰파드는 USA 인기 시리즈에는 단골 악역으로 출연하는 영국배우다. 셰파드는 '번 노티스' '레버리지' 등에 선 굵은 악역으로 등장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이기에 그가 '화이트 칼라'의 파일럿에 등장했다는 점은 USA에서 '화이트 칼라'를 어떤 비중으로 다루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화이트 칼라'는 뉴욕에 바치는 연가다. 그렇기에 뉴욕을 잊지 못하는 후천적 뉴요커들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맨하탄을 주된 배경으로 하고 있는 데다가, 에피소드마다 화려한 도시의 전경과 비루하고 비열한 골목을 잊지 않고 구석구석 누비기 때문이다. 하루는 패션위크의 화려한 옥외 파티장이 무대가 됐다가, 또 하루는 공사중인 도시의 한구석, 또 하루는 차이나타운으로 TV앞에 앉은 당신을 초대한다. '섹스 앤 더 시티'의 5번째 주인공이 뉴욕이었다면 '화이트 칼라' 역시 같은 찬사를 받을 만하다. 다만 아직은 시즌 초반이니 조금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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