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분석] 하루키의 노벨문학상 가능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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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24일 16시 43분


● 하루키가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는 7가지 이유
● 하루키는 문학계의 앤디워홀이 될 수 있을까?


전 세계 모든 공항의 환승대기실에는 서점이 자리한다. 장거리 여행자를 위한 친절한 배려다.

공항서점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책 가운데 하나가 영국 빈티지 출판사가 펴낸 하루키 영문판 페이퍼백이다. 그 작은 서점에 한 두 권이 아니라 네다섯 권이 몰려 있을 때도 있다. 'HARUKI MURAKAMI'라는 큼지막한 로고와 반쯤 벗은 반라의 일본계 여인이 독자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하루키가 아시아권을 넘어 전 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았다는 뉴스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이미 40여 개국에서 번역 출판됐고 심지어 러시아와 미국에서는 하루키 전집이 만들어져 성실한 독서가의 서가를 메우고 있다. 문장의 흡입력이 좋은데다 비감 어린 성장소설을 판타지의 즐거움과 함께 선사할 작가는 전 세계에 흔치 않기 때문이다.

전세계 어느 서점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하루키의 저작들.
전세계 어느 서점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하루키의 저작들.


그러나 그의 책이 빵처럼 팔리던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상상력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던 질문이 있었다.

'과연 하루키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을까?'

전통적인 문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루키의 작품은 '대중소설' 그 자체였다. 마치 스티븐 킹이나 마이클 크라이튼이 노벨문학상 후보로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그 역시 싸구려 연애소설이나 성애(性愛)소설을 만들어 대중의 말초적인 신경을 사로잡는 문학 외적인 존재로 치부됐다.

"하루키가 노벨상을? 뻥치지 마!"

그러나 터무니없던 상상은 현실화 되어가고 있다. 30년에 걸친 하루키의 진화와 더불어 세상과 전 세계 문단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벨상으로 가는 길목으로 평가받는 프란츠카프카 문학상(2006년)과 예루살렘 문학상(2009년)을 수상한 하루키는 2007년 이후 노벨문학상에 가장 근접한 아시아 작가로 평가받는다.

한국 문단에서 하루키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다. 이미 20년째 감탄과 존경, 때론 질시와 폄훼의 대상이 되어왔다.

게다가 '1Q84'는 한국어판 출간 4개월 만에 70만부에 이르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기록했고 13억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인세에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어 10년 가까이 노벨문학상 열병에 시달린 한국문단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의 최신작 '1Q84'는 아직 영문으로 번역되지도 않았지만 일본문단은 하루키가 이 작품으로 노벨상을 거머쥘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그 가능성을 점검해 본다.

노벨문학상은 가장 정치적인 상이면서도 모든 지성인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영예다.
노벨문학상은 가장 정치적인 상이면서도 모든 지성인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영예다.

1. 픽션과 판타지를 능숙하게 소화

"지난 35년간 제가 읽은 한국 소설 중에는 퓰리처상이나 부커상 후보에 오를만한 책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케빈 오록 경희대 교수)

"한국 문학작품에는 다큐멘터리성 작품이 너무 많다. 너무 단순하고 실제 생활하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얘기인 것이다. 문학은 현실을 뛰어넘는 픽션이어야 한다."(서강대 안선재 명예교수)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번역가 대회에서 '한국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하는 이유'로 거론된 전문가들의 견해다. 한마디로 '부족한 공부'와 '소설로서의 매력 부족'을 지적한 것이다. 이 자리에선 번역이 빈약해 노벨상에 근접하지 못한다는 통념을 깨는 충격적인 비평이 줄을 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통렬한 비판은 한국문학은 상상력이 빈곤하다는 지적이었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 최인훈, 이문열, 황석영, 조세희, 고은 등 한국의 거장들의 작품은 비감어린 한국의 현대사를 바탕에 깔고 있지만, 문학이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의 구축은 빈약하다는 인상을 풍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하루키는 한국문단이 갖지 못한 풍부한 매력을 뿜어낸다. 언제나 평범한 일상을 얘기하면서도 독자들에게는 "딴 세상을 다녀온 것 같다"는 지독한 판타지의 중독성을 안겨주고, 그 점이 전 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2. 노벨상으로 가는 길목 선점-카프카 문학상과 예루살렘 문학상

"높고 단단한 벽과 그 벽에 부딪혀 깨지는 달걀이 있다면, 나는 언제나 달걀 편에 설 것입니다."(2009년 1월 예루살렘 문학상 수상식장에서 하루키의 수상 소감)

2008년 말 일본 문화계는 하루키의 예루살렘 문학상 수상 반대여론으로 들끓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내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력정책을 지속해 수천 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내던 시기였다. '평화'라는 주제는 전후 일본 문화계, 즉 단카이 세대와 일본 지성계가 놓칠 수 없는 화두였다. 때문에 그 세대의 중심인물인 하루키에게 가해진 압력은 상상 이상이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이 같은 여론을 뒤로한 채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리고 지금도 회자되는 그 유명한 '벽과 알'이라는 주제의 수상소감을 발표한다. 그가 젊은 시절 반복했던 정치적 허무주의가 숭고한 생명이념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고, 전 세계 질서를 쥐락펴락 하는 유태인을 부끄럽게 만들 아시아 전후세대의 절묘한 역공이었다(물론 이런 선택이 노벨문학상을 위한 포석이라는 비판도 뒤따랐다).

2006년 수상한 프란츠 카프카 문학상도 빼어놓을 수 없는 성과다. 사실상 '해변의 카프카'라는 작품은 비운의 천재 카프카에 대한 최상의 '오마주'에 가깝다. 이 문학상은 역사가 비교적 짧지만 역대 수상자들인 오스트리아의 여류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2004)와 극작가 헤럴드 핀터(2005년)가 각각 그 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노벨상으로 가는 중요한 코스로 통한다.

하루키는 대중적인 소설을 써왔지만 그의 삶 자체는 고전주의를 지향해 아무런 흠결을 남기지 않았다.
하루키는 대중적인 소설을 써왔지만 그의 삶 자체는 고전주의를 지향해 아무런 흠결을 남기지 않았다.

3. 전 세계 문학계 세대교체 '전후세대/아시아/대중소설'

하루키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는 전후 맥락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가 지닌 포지셔닝의 장점으로는 노벨상이 선호하는 '비서구권'이라는 점도 있지만 전후 세대, 게다가 전통적인 고전주의 소설가가 아니라는 점도 한몫한다.

전후 세대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이 주어지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노벨상 수상위원회의 변화도 조심스럽게 감지된다. 이미 국제 문단에서 고전주의로 노벨상을 수상할만한 재원은 바닥이 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거장이라고 이름 불릴만한 작가 가운데 살아있는 사람도 드물지만 대중과 소통하는 작가는 더더욱 없다.

노벨상에도 보수주의와 혁신주의가 공존한다. 2009년 노벨상 수상자인 독일계 헤르타 뮐러의 수상은 보수주의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평이 좋지 않았다. 노벨문학상이 대중과 괴리된다는 비판은 이제는 큰 부담이 된다.

2006년 터키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57) 역시 변화된 노벨상의 흐름을 반영한다. 1952년생으로 비교적 젊은 그는 추리와 영화적 기법을 활용한 대중작가이자 포스트모더니즘 기법과도 무관치 않다.

아시아에서 일본 문학계는 여타 국가를 압도하며 세계 문단의 새로운 중심축으로 성장했다. 그 가운데 대중성과 확고한 문학 이력을 갖춘 사람을 뽑는다면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가 선두에 설 수밖에 없다.


2006년 10월 일본 프란츠 카프카 상을 수상하는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사진=로이터
2006년 10월 일본 프란츠 카프카 상을 수상하는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사진=로이터

4. 노벨문학상의 정치적 이해관계

학문적 엄정함이 지배하는 노벨상에서 '평화상'과 '문학상'은 가장 정치적인 상이다. 평화라는 거대한 이념에 맞춰 제3세계와 대중성을 고려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지형도가 다른 조건들을 압도할 수 있다.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일본인으로는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했을 때 노벨상 위원회는 "일본적인 정서의 진수를 표현해내는 위대한 감수성을 지닌 그의 이야기 통제력에 이 상을 드린다"고 발표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급성장한 일본의 국력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선정 이유를 밝힌 발표문을 보면 아시아 작가에 대한 배려가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노벨 문학상과 관련해 한국인 수상자가 후보로 고려된 것이 사실이고 지난 10년간 그런 가능성을 지닌 거장들의 작품에 집중적인 번역 지원이 이뤄졌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2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나 다른 아시아 작가들은 여전히 노벨문학상 후보군에서 변방에 머물러 있다.

성대한 노벨상 축하 연회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에서 10일 열린 노벨상 축하 연회 장면.사진=로이터 연합
성대한 노벨상 축하 연회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에서 10일 열린 노벨상 축하 연회 장면.
사진=로이터 연합

5. 영어가 가능한 거의 유일한 아시아 작가

하루키는 60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소설가 가운데 가장 영어 문화권에 근접한 작가로 손꼽힌다. 10대 시절부터 미국문화를 동경한 그의 문학인생은, 서구문화를 수입해 자신의 독특한 문화로 포장해 낸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와도 무관치 않다.

실제 일본문학이 아닌 영어권 문학을 보면서 자란 하루키는 지금도 영어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번역가적인 기질은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도 잘 나와 있는데 그가 번역한 '호밀밭의 파수꾼'은 일본에서 오랜 시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이 점은 하루키의 문학이 일본을 배경으로 했지만 정신은 오히려 미국이나 유럽 등 서구문화와 닮아 있다는 비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클래식이나 재즈 혹은 대중음악을 떠올려 보거나, 그가 소설의 모티브로 사용한 스콧 피츠제럴드(위대한 개츠비)나 프란츠 카프카(해변의 카프카) 조지 오웰(1Q84)도 아시아가 아닌 서구작가였다.

1990년대 초반에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연수를 하며 영어로 된 문장이나 영어 표현을 갈고 닦았다. 배낭여행 수준으로 서구를 접한 한국 작가들과의 세계화 격차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6. 60대에 접어든 안정적인 이력

1949년생인 하루키는 2010년에 드디어 진정으로 60대에 접어든다. 언제나 청춘일 것만 같았던 그도 만만치 않은 나이를 먹었다.

전후 세대가 어느새 60대에 접어들었다는 얘기는 이 세대가 전 분야의 최고 정점에 올랐다는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 언제나 비주류일 것만 같았던 이들이 어느덧 주류 지성인이자 사회원로로 승격이 됐다는 의미다.

게다가 하루키는 30년에 이르는 문학인생 가운데 특별한 설화나 현실정치 논란에 휘말리지 않았다. 소설의 소재는 대중주의였지만 문학인생 자체는 고전주의인 셈이다. 오히려 '비정치성'에서 출발했지만 1995년 옴진리교의 독가스 살인사건을 밀착 취재하는 등 사회성을 길러 온 희귀한 작가다.

50대에 노벨상을 거론하는 것은 조금 이르다. 오바마(48) 미국 대통령의 평화상 수상은 특수한 경우였다. 그 어떤 분야든 20년에 걸친 시간의 검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노벨상 수상자들은 평균적으로 60대 후반에 상을 수상했고 노벨 문학상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고 하루키가 70대까지 후보자로만 남아있는 것도 어색하다. 그의 소설은 여전히 아시아와 서구에서 '청춘'의 상징으로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문학상 위원회는 "하루키의 예술적 업적과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고 적시했다. 꽤 적합한 선정 이유였다.

하루키에게 노벨문학상이 주어진다면 아마도 '1Q84'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하루키에게 이 작품의 완결은 가장 중차대한 도전이 될 전망이다.
하루키에게 노벨문학상이 주어진다면 아마도 '1Q84'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하루키에게 이 작품의 완결은 가장 중차대한 도전이 될 전망이다.

7. "서구문화의 아류라고? 천만에, 독특한 오리지널리티"

그러나 '하루키 노벨상론'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다름 아닌 포스트모더니즘 기법, 즉 혼성모방에 가까운 그의 B급 문학이 정통문학 최고 권위의 상징인 노벨문학상에 합당하냐는 기존 질서의 강고한 저항이 그것이다. 심지어 다작(多作) 작가라는 명예는 대표작이 없다는 비판과 일맥상통한다.

따지고 보면 이런 정서는 한국 문단의 하루키 폄훼와 맞닿아 있다. 소설가의 문장은 피와 땀으로 쓰여야 하고, 문학은 결국 인간해방이자 구원에 가깝다는 문학 숭고주의 정서는 마치 영화를 찍듯 현대인의 일상을 묘사하는 하루키를 거부하는 근본적 원인이 된다.

게다가 하루키는 서구 문화의 아류로 치부될 수 있다. 아시아 문학이란 '오리지널리티'가 없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상황이다.

문화평론가 최영일은 하루키를 향해 쏟아지는 한국 작가들의 시선에 이렇게 답한다.

"하루키를 연애소설 작가로 보는 것만큼 한국문단의 폐쇄성을 입증하는 사례도 드물다. 하루키는 현대사회에서 소통의 어려움과 구원이 없음을 토로한 니힐리즘(허무주의)의 대가로 봐야 한다. 그리고 하루키를 서구문학의 아류(亞流)로 본다면 과연 아류는 무의미한 것일까? 이미 영화계에선 타란티노나 왕가위의 B급 정서가 주류로 올라섰다. 팝 아트의 대가인 앤디워홀도 마찬가지다. 문학계도 언젠가 하루키를 수용할 것이고, 그 꼭짓점이 다름 아닌 노벨상이 될 것이다."


"하루키의 노벨상, 한국 팬들이 더 기뻐할지도…"

한국어의 노벨문학상 도전은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이미 영어(27명) 프랑스어(14명) 독일어(12명)를 비롯해 변방어인 히브리어 벵골어 이디시어 등 24개 언어가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았다. 한국어는 사용 기준으로 보면 세계 10위권 언어의 위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두터운 팬 층을 확보한 하루키의 노벨상 수상은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외국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라는 점에서 한국에서도 매우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 틀림없다. 물론 한국 문단에게는 재앙 같은 뉴스이겠지만 말이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O2/커버스토리] 무라카미 하루키 ‘1Q84’

● 뉴요커도 중국인도 닮고 싶어 하는 작가 '하루키'
● 한국판이 나오자마자 70만부 판매, 선인세만 13억
● 철저한 무국적성이 주는 마력, 그리고 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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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많은 댓글

  • 2009-12-25 14:53:12

    기자의 독특하고 대담한 시각이 흥미로웠습니다. 저도 하루키 좋아합니다. 민족주의는 축구경기 할 때나 쓸 일이지, 문학 작품에서는 굳이 동원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과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닮은 형제이기도 하죠... 하루키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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