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만난 배우 류승범(29)은 여느 배우와 달리 손수 차를 몰고 나타났다. 6개월 전부터 소속사도, 매니저도 없이 혼자 약속을 잡고 운전도 한단다. 직접 골라 입고 온 옷도 지인의 결혼식 때 즐겨 입는 검정 재킷. 그는 ‘혼자서 다 해내기’의 이유를 “자유롭고 싶어서라기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친해지면 본의 아니게 상처 주잖아요. 상처 주게 될 사람을 한 명이라도 줄이고 싶었어요. 아무 도움 없이 내 힘으로 살아보고도 싶고…. 잘한 선택 같아요.”
착하고 싶다는 소망과 달리 내년 1월 7일 개봉하는 영화 ‘용서는 없다’에서 그는 환경운동가 출신 살인범 이성호 역을 맡았다. 어릴 적 겪은 사건을 복수하고자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지만 눈에 힘을 주지도, 분노에 몸을 떨지도 않는다. 후줄근한 차림에 얼굴을 절반쯤 가린 긴 웨이브 머리는 보헤미안처럼 보인다. 그렇게 그는 위악도 위선도 없이, ‘착한 놈인지 나쁜 놈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살인자를 연기했다.
영화 ‘용서는 없다’에서 배우 류승범은 용서를 할 수 없어 복수를 하게 된 살인범 이성호 역을 맡았다. 그에게 용서를 못할 정도로 분노를 느낀 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자고 나면 뒤끝 없는 스타일”이라며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도 한참 운 뒤 기도하면 끝난다”고 했다. 염희진 기자
“배역을 위해 머리를 기른 건 아니에요. 안 감아도 티가 안 나니 편하더라고요.(웃음) 배역에 맞춰 살을 빼거나 외모에 변화를 주지는 않아요. 배우의 생김새는 고체 덩어리일 뿐이죠. 중요한 건 이 작품을 통해 류승범이라는 사람의 철학이 얼마나 바뀌느냐는 겁니다.”
그는 한 작품을 하면 상대 배우와 동거를 할 만큼 연기에 두 발을 다 담그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주어진 배역에만 빠지는 몰입형 배우는 지양한다. 그는 “퍼즐 맞추듯 배역에 나를 끼워 맞추는 꼭두각시 배우는 되기 싫다”고 했다. “이성호 역을 나보다 잘할 수 있는 배우는 세상에 널렸다. 살인자 역의 최고봉은 케빈 스페이시(‘세븐’ ‘유주얼서스펙트’ 등에 출연한 미국 배우) 아니냐”고도 했다.
“촬영 기간 내내 최고의 살인자를 연기하려 나를 바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배우라는 직업이 내 삶을 위해서 하는 거 아닌가요? 내 시간 바쳐 남의 인생을 충실히 산 것만으로 받은 돈값은 한다고 생각해요. 대신 이 영화를 통해 만난 사람들과 순간들을 통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고 싶어요. 그건 다음 작품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죠.”
그렇다면 이 작품을 통해 그의 인생은 얼마만큼 달라졌을까. 그는 “외로움을 많이 타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전매특허인 역삼각형 입술 모양을 지어 보이며 해맑게 웃었다. “요즘 영화 ‘방자전’을 촬영 중인데요. 제가 맡은 역할은 당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몽룡이거든요. 야설(야한 소설)적인 농담이 자주 등장해서 그런지 요즘엔 ‘야설적인 게 과연 나쁜 것이기만 한 걸까’를 고민하고 있어요. 무지 심각하게.”
대리 인생을 통해 스스로의 인생을 쉼 없이 가꿔 나가는 삶. 그는 배우가 가진 특권을 기꺼이 누리고 있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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