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안현진]생활형 스파이 美NBC ‘척’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월 20일 15시 43분


미국 NBC는 여기저기 비밀을 흘리고 다니는 \'생활형 스파이\'를 주인공으로 한 TV시리즈 \'척\'을 방영중이다.
미국 NBC는 여기저기 비밀을 흘리고 다니는 \'생활형 스파이\'를 주인공으로 한 TV시리즈 \'척\'을 방영중이다.
제임스 본드 때문일까? '스파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몇 가지 심상은 사실 미디어와 문학이 만들어낸 지독한 클리셰(Cliche: 예술이나 문학작품속의 상투성)에 지나지 않는다. 기교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자로 잰 듯 떨어지는 흑백의 턱시도, 스파이 곁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팜 파탈, 동유럽을 배경으로 전해지는 냉전의 분위기와 핵무기를 둘러싼 첩보극이 그 몇 가지다.

그런데 여기 이런 클리셰하고는 동떨어진 생활형 스파이가 있다.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하고 여기저기에 비밀을 흘리기 십상인 이 남자는 NBC의 TV시리즈 '척'의 주인공 척 바토스키다. 시리즈의 제목 '척'은 영미권 국가에서 남자 이름 '찰스'를 부르는 애칭의 하나로, 찰리, 척, 처클, 처키 등 다양하게 변주된다.

척 역시 평소에는 자신을 "척"이라고 불러주기를 바라지만 첩보활동을 시작하면 유아적 흥분을 누르고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찰스 카마이클"이라는 가명을 대며 근거 없이 용감해지는 이유도, 다 스파이라는 단어가 가져오는 수상한 클리셰 덕분이다.

▶ 옆집에 사는 그 청년, 어느 날 갑자기 스파이가 되다

꿈도 목표도 없이 하릴없이 빈둥거리던 청춘 찰스 바토스키(재커리 레비 분)가 이십하고도 몇 번째 생일을 맞이한 그날, 일생일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찰스를, 아니 찰리를, 아니 척을 시험 부정행위로 모함해 스탠퍼드에서 쫓겨나게 한 뒤 여자친구인 질까지 빼앗은 한때의 절친, 그러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해온 브라이스 라킨(매튜 보머)으로부터 생일 축하 이메일이 온 것이다.

대학시절 척과 브라이스가 재미로 만들었던 퍼즐형 게임형식으로 암호화된 이메일은 "Happy Birthday"라는 축하 메시지 대신 수백만장의 암호화된 이미지를 척에게 보여주었는데, 밤새도록 척의 뇌리에 새겨진 그 모든 이미지는 그의 머리를 '인터섹트'라는 슈퍼 컴퓨터로 변환시켰다.

인터섹트는 9.11 테러 뒤 NSA(미국 국가안전보장국)와 CIA(미국 중앙정보국)가 테러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만든 슈퍼 컴퓨터로, CIA에서 일했던 브라이스는 그 슈퍼 컴퓨터의 정보를 모두 척에게 보낸 뒤 인터섹트를 폭발시켰다. 그렇기에 미국은 물론 이해관계에 놓인 많은 조직과 국가들이 인터섹트를 차지하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

그리하여 척은 새로운 인터섹트를 재건하기 전까지 NSA와 CIA의 보호를 받으며 슈퍼컴퓨터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다. 척이 인터섹트를 가동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자극이 필요한데, 그 자극은 이미지일 수도 있고 소리, 키워드, 음성정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척이 떠올리는 정보에 따라 CIA 요원 사라(이본느 스트라호브스키)와 NSA 소속 존 케이시(아담 볼드윈)는 작전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수월하게 척을 감시하고 또 보호하기 위해 존은 척의 직장 동료로 그리고 사라는 척의 여자친구로 위장해 그 주변에 머문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국가 기밀을 머리에 담게 된 척이 어떤 사람인고 하니, 나이는 이십대 후반에 가까운 중반이고, 스탠퍼드에서 퇴학당한 뒤 변변하게 노력한 것 없이 대형 전자제품 마트에서 컴퓨터를 수리하면서 시간당 11달러에 5년 이상을 허비한 이른바 3류 인생이다.

질을 브라이스에게 빼앗긴 뒤로는 남녀관계에 대한 자신감도 바닥을 쳐 여자친구도 사귀어본 적 없고, 의사인 누나 엘리(사라 랭카스터)와 역시 의사인 누나의 남친 '캡틴 짱'(Awesome을 연발해 생긴 별명)과 한 집에서 살면서 자격지심만 늘어갔다.

척이 어떤 사람인지는 무엇보다 그의 패션코드가 말해준다. 일할 때나 평소에나 셔츠는 절대로 바지 속에 넣지 않으며, 최신유행도 아니지만 나이 들어 보이지도 않는 좁은 타이를 매고 있다. 결정적으로 그는 구두 대신에 컨버스 운동화를 신는다. 자신의 인생이나 직장에서의 책임감도 최소한인, 전형적인 피터팬 증후군 컴퓨터 기크(Geek)의 외모다.
척은 대학시절 친구이자 CIA요원인 브라이스가보낸 이메일을 열고 '인터섹트'가 된다
척은 대학시절 친구이자 CIA요원인 브라이스가보낸 이메일을 열고 '인터섹트'가 된다

▶ 스토리, 액션, 캐릭터의 3박자가 만들어낸 탄탄한 조화

하지만 '척'의 매력은 클리셰를 뒤틀어놓은 기본 설정보다, 코미디가 갖춰야 할, 아니 드라마가 갖춰야 할 훌륭한 자질을 갈고 닦은 데에 있다. 그 자질이란, "매력적인 캐릭터와 탄탄한 줄거리"다. 다시 말해 '척'의 이야기에는 엉성한 구석이 거의 없다. 인간의 두뇌를 코드화 시켰고, 그 코드가 어떤 자극에 따라 가동된다는 가설을 받아들이고 나면 '척'의 이야기는 물 흐르듯 매끄럽게 45분 가량의 러닝타임을 흘러간다.

이야기는 감독과 작가가 꾸며놓은 수로를 따라 때로는 굽이치고, 때로는 낙하하며 때로는 눈물이 되어 흐르기도 한다. 액션첩보코미디지만 그 안에 내포된 진정성과 개연성이 그렇게 시청자를 빠져들게 만든다.

척이 사랑하는 누나와 친구들에게 계속해서 거짓말을 해야 하는 스파이로서의 삶에 환멸을 느낄 때, 시청자가 느끼는 안쓰러움이 그 주된 이유이고, 더 나아가 "스파이는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철칙을 지키기 위해 사라와 척이 자석 같은 서로의 감정을 애써 외면하려고 할 때 더욱 그렇다.

탄탄한 줄거리가 '척'의 두드러지는 첫 번째 매력이라면, 둘째는 액션이다. 총괄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린 맥지(McG) 감독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장식한 '미녀 삼총사' '터미네이터4: 미래전쟁의 시작' 등의 명성에 걸맞게 호쾌하고 합(合)에 충실한 액션을 매 에피소드마다 선 보인다.

어딘가 엉성해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 격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척과 다르게, 훈련 받은 전문 요원인 사라가 보여주는 거침없는 액션신이 그 중에서도 발군인데, 미니드레스를 입었건 스키니진을 입었건, 혹은 패스트푸드점의 종업원용 유니폼을 입었던 간에 사라가 휘두르는 통쾌한 발차기는 스크린 속 공기를 가로지르며 시청자를 대신해 아드레날린 수치를 증폭시킨다. 양 갈래로 나눠 높이 올려 묶은 머리에 코르셋이라도 입은 듯 꼭 죄어진 유니폼 아래 튼튼한 허벅지를 감춘 사라는, 마치 '스트리트 파이터'의 춘리가 머리를 금발로 물들이고 TV 브라운관에서 환생한 것처럼 강건하게 아름답다.

세번째는 훌륭한 캐릭터와 그에 걸맞은 캐스팅이다. 예쁘장한 소년이 키만 커진 것 같은 척 역할의 재커리 레비와, 근육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와는 대조적으로 웃을 때 드러나는 덧니마저도 귀여운 사라 역할의 호주출신 배우 이본느 스트라호브스키, 그리고 NSA의 묵직한 마초 요원 존 케이시를 연기하는 아담 볼드윈은 '척'을 이루는 트라이앵글로, 각자의 위치에서 과도하지 않은 연기로 드라마의 균형을 맞춘다.

척, 사라, 존이 '척'에서 스파이 월드의 무게중심이라면, 일상생활 속에서는 척의 누나인 앨리와 그의 남자친구 '캡틴 짱' 데븐, 그리고 척의 직장 동료들인 모건(조슈아 고메즈)과 제프, 레스터, 안나 등이 또 다른 균형을 이룬다. 그렇게 척을 가운데 둔 2개의 세상은 묘한 관계를 맺는데, 특히 재미있는 점은 이 두개의 소우주가 에피소드 안에서 데칼코마니처럼 한 가지 상황을 동시에 연출할 때다. 예를 들면 척이 사라와의 관계에서 위장이 아니라 진실한 감정을 나누기를 원할 때, 모건 역시 안나와 비슷한 이유로 다투고 토라지는 식이다.

▶ 금지된 사랑의 비애가 녹아 더욱 슬픈 코미디

하지만 무엇보다도 '척'이 나의 심장을 사로잡은 이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알면서도 갈망하는 척의 순진한 마음 때문이다. 인터섹트가 머리 속에 주입된 뒤 어쩔 수 없이 사라와 연인인 척 해야 하는 그는, 사실 그렇게라도 사라 옆에 있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사라도 마찬가지다. 이제까지 함께 일해 온 훌륭하고 냉철한 스파이들과는 달리 뜨거운 심장이 뛰는 그리고 끝없이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내보이는 척을 언제까지고 보호해주고 싶고, 거짓의 위장을 드러내고 진짜로 사랑하고 싶다.

하지만 스파이라는 현실은 그 둘을 가로 막는다. 때때로 그 진심을 눈치챈 케이시가 "로미오 요원"이라고 척을 놀리기는 하지만, 진심을 알면서도 안타깝게 바라만 보는 두 사람의 화학작용은 그래서 더 뜨겁게 달아오른다. 작전을 마치고, 아파트의 앞마당에서 둘은 늘 전하지 못할 말을 입안에서 굴린다. 머뭇거리고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면 상대는 그 마음을 알면서도 뒤돌아선 다음이다.

그렇게 매일 가짜로 사랑이 시작되고, 매일 가짜 이별로 진심은 덮어진다. "우리가 만약 진짜 연인이었다면…"으로 시작하는 수많은 가정은,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작전을 위해 실제로 행해지고, 그저 위장이었기 때문에 추억도 무엇도 아닌 수많은 일과 중 하나가 되어 사라진다.

"이웃에 사는 스파이(The Spy Next Door)"라는 모토를 드라마의 저변에 깔고 친구와 가족을 속이며 반쪽짜리 삶을 살수 밖에 없는 첩보원의 일상을 그려낸 '척'은 2007년 첫 시즌을 시작해 2010년 1월 시즌3을 출항시켰다. 사실 '척'의 시즌3은 팬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세상에 공개되지 못할 뻔한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데, 그 기구한 운명은 시즌1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덧 3년이 지났지만, 2007년 미국 방송영화계는 WGA(미국 작가협회)의 파업으로 한동안 TV에서 지나간 방송을 재탕, 삼탕하는 어두운 시절을 거쳤다. '척'은 2007년 그 불운한 시기에 첫 시즌을 출항시켰던 드라마로, 파일럿이 좋은 반응을 얻어 시즌 전체가 발탁됐음에도 불구하고 WGA의 파업 때문에 시즌1을 13개 에피소드로 대폭 축소할 수 밖에 없었다. 시즌2는 22개 에피소드로 제대로 모습을 갖추고 방송이 됐지만 NBC에서는 시청률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시즌3 방영에 대한 결정을 보류했고, 결국 2개월에 걸친 "'척' 구하기 캠페인(Saving Chuck Campaign)"이 온라인을 통해 진행되고 나서야 겨우 시즌3 방영이 결정되었으니, 이 정도면 '척'에 대한 팬들의 애정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척과 새라의 위장 관계는 둘다 진심이기에 더욱 애틋하다
척과 새라의 위장 관계는 둘다 진심이기에 더욱 애틋하다

▶ 인터섹트 2.0으로 업그레이드되려는 척의 고군분투

시즌1과 2가 척의 머리 속에 있는 인터섹트를 지우고 척을 자유롭게 하려는 이야기를 중심에 놓았다면, 시즌3은 조금은 다른 행보를 택했다. 이제 척은 스파이로서의 삶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인터섹트를 만든 오리온이 자신과 누나를 오래전에 떠나갔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인터섹트 2.0을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머리 속에 주입하게 된 그는 이제 자신이 구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 그 중에서도 가족, 친구들을 위해 훌륭하고 완벽한 스파이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현재 에피소드 3편까지 방영된 시즌3에서 척은 인터섹트 2.0을 제대로 가동시키지 못해 CIA로부터 버림을 받을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다. 퇴출당한 스파이가 될 뻔한 척을 훈련시킬 최정예요원 '쇼'로 '슈퍼맨 리턴즈'의 브랜든 라우스가 곧 게스트로 시즌3의 4개 에피소드에 등장할 예정이라는데, 탄탄한 몸과 조각상 같은 외모로 사라와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라 척의 러브라인에 또 한번 위기와 질투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척'은 게스트 어피어런스(Guest Appearance: 유명인이 TV시리즈에 잠깐 등장하는 것)에서도 훌륭한 조화를 선보여왔다. 유명인을 등장시켜서 스토리가 미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꼭 그와 어울리는 배우를 캐스팅해서 시리즈를 더 재미있게 만들어왔다는 이야기다.

브랜든 라우스 이전에 등장한 유명인으로는, 니콜 리치가 사라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로스트' '반지의 제왕'의 도미닉 모나한이 약물 중독 상태의 록스타로, '캔디맨'의 토니 토드가 CIA 장군으로, '미이라'의 이모텝 아놀드 보슬루가 CIA의 변절 요원들이 만든 조직 풀크럼의 조직원으로 등장했다.

그 밖에도 레이첼 빌슨이 척과 잠시 사랑에 빠지는 샌드위치 가게 주인으로, 마이클 클라크 던컨이 인터섹트를 찾아 없애려는 풀크럼 요원으로 얼굴을 내민 바 있다. 브랜든 라우스의 출연은 시리즈 안에서 '쇼'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이 전부로, 지금 인터넷 연예 뉴스와 가십 페이지, 블로거들은 "슈퍼맨 보다 척을 더 잘 훈련시킬 사람이 어딨겠냐"며 '척'이 내놓은 선택에 또 한번갈채를 보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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