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한국영화의 성적은 기대치를 훨씬 웃돌았다. 2009년 한국 영화의 최종 시장점유율은 49%. 제작 편수가 평균의 반에도 못 미칠 것이고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는 이대로 끝이며 영화 인력의 대부분이 너도 나도 다른 살길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비관을 했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수치다.
경기 침체와 스크린 쿼터의 축소 등 '외환'에 더해 거품이 그득했던 '내우' 속에서도 '해운대'와 '국가 대표'라는 대박 영화들이 나왔고 '과속 스캔들' '7급 공무원' '워낭 소리' 등 의외의 흥행작들이 나왔으며, '박쥐'와 '마더' 등을 통해 거장 감독들도 제 몫을 했다.
이제 2010년 새해를 맞았다. 지난 해 말 개봉한 '전우치'가 초대형 흥행작 '아바타'에 맞서 선전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 영화계는 올해도 다양한 작품들로 관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기지개를 켜고 있는 중이다.
충무로의 \'맏형\' 강우석 감독은 신작 \'이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사진제공 연합.
▶ '천만 클럽' 감독들의 귀환
올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천만 관객을 끌어 모았던 초대박 흥행 감독들의 귀환이다. 우선 충무로의 맏형이자 '실미도'로 국내 첫 천만 관객의 포문을 열었던 강우석 감독의 '이끼'가 있다.
이 작품은 인터넷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윤태호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스릴러 물. 모든 것을 박탈당한 한 남자가 외진 산골 마을에 있는 아버지의 집에 정착한 뒤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이다. '해피 엔드' '모던 보이' 의 정지우 감독이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는데다 정재영 박해일 유해진(!) 등 개성 있는 배우들이 참여해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다.
'왕의 남자'로 관객과 평단의 찬사를 한 몸에 받으며 천만 클럽에 합류했던 이준익 감독 역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준비 중이다. 이 역시 박흥용 작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왕족 출신의 서자와 기생의 자식, 그리고 맹인 검객 등 태생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세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사극이다. 황정민 차승원 백성현이라는 굵직굵직한 배우들이 참여한 가운데 현재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 중이다.
'해운대'로 천만 클럽에 가입한 윤제균 감독은 '제7광구'라는 다음 작품을 준비 중이다. 3D영화로 제작될 것으로 알려지면서 더욱 화제를 모으고 있다. 스포츠동아 자료사진. '해운대'로 가장 늦게 천만 클럽에 가입한 윤제균 감독은 전작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제 7광구'라는 다음 작품을 준비 중이다. 이 작품은 시추선 안에 살고 있는 괴물을 소재로 한 영화로, 최근 뜨거운 화두로 떠 오른 3D 영화로 제작될 것으로 알려졌다. '해운대'를 통해 한국형 재난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윤제균 감독이 이번에는 3D 라는 거대한 흐름에 어떻게 도전할 지 귀추가 주목된다.
▶ 리메이크 열풍
올해는 리메이크라는 장르가 한국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는 원년이 될 듯 하다. 그 동안 리메이크라는 장르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한국 영화계는 올해 한국 고전 영화뿐 아니라 홍콩 영화까지 리메이크하며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먼저 60년대 한국영화계의 천재 감독이자 배우 이혜영 씨의 아버지로도 잘 알려져 있는 고 이만희 감독의 '만추'가 '가족의 탄생'을 연출한 김태용 감독의 섬세한 손길로 재구성된다. 원작 속 신성일 역할에는 현빈, 문정숙의 역할에는 '색.계'로 일시에 스타덤에 오른 중국 배우 탕웨이가 캐스팅돼 지난 해 말 촬영에 들어갔으며, 미국 올 로케이션으로 진행된다.
신작 '하녀' 역시 올해 관객을 만날 예정. 임상수 감독이 메가톤을 잡았고 전도연이 하녀, 이정재가 주인집 남자 역으로 출연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전도연의 캐스팅 소식으로 제작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김기영 감독의 '하녀' 역시 올해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한 때 드라마 작가 김수현씨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가했다 하차하는 진통을 겪기도 했지만 '그 때 그 사람들' '오래된 정원'의 임상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으면서 지난 3일 크랭크인 했다. 전도연이 하녀로 일하는 주인집 남자 역에는 이정재, 여주인 역에는 최근 주가를 올리고 있는 신예 서우가 열연한다.
80년대 주윤발의 성냥 씹기를 좀 따라 해 본 남자 관객들이라면 무엇보다도 '영웅본색'의 리메이크 소식이 가장 반가울 지도 모르겠다. 홍콩 느와르의 최고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올해 한국판으로 다시 태어날 계획이다. '역도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의 송해성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며, 송승헌 주진모 김강우 조한선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미남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한국 제목은 '무적자'로, '국적이 없다'는 뜻과 '적수가 없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졌다.
2008년 '추격자'로 스타 감독의 반열에 오른 나홍진은 올해 '황해'라는 스릴러물을 선보인다. 이 작품에는 한국 영화 최초로 미국 이십세기 폭스사의 투자가 결정됐다. 스포츠동아 자료사진. ▶ 기대되는 스타 감독들의 신작
아마도 신작이 가장 기대되는 감독을 뽑으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단연 나홍진을 뽑을 것이다. 2008년 '추격자'라는 걸쭉한 데뷔작으로 일약 스타감독의 반열에 오른 그는 올해 '황해'라는 스릴러물을 선보인다.
특히 이 영화는 한국 영화 최초로 미국 이십세기 폭스사의 투자가 결정되면서 주위의 기대와 부러움을 동시에 받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전작의 배우였던 김윤석, 하정우가 다시 주연으로 출연한다는 것. 첫 작품의 대박 성공이라는 압박감 속에서 같은 배우와 같은 장르를 선택한 그가 이번에는 또 어떤 새로운 작품을 보여줄 지, 그 대담한 승부수의 결과가 무엇이 될 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제는 그 이름이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김지운 감독 역시 신작을 준비 중이다. 제목은 '악마를 보았다'. 선이 굵직한 남성영화의 대가이자 스타일리시한 미장센의 고수인 그는 이 영화에서 싸이코 패스를 쫓는 정보국 요원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으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연기파 배우들이라 할 수 있는 최민식과 이병헌이 캐스팅되어 화제다. 이로써 이병헌은 김지운 감독의 영화에 '달콤한 인생' '놈놈놈' 에 이어 세 번째 출연하게 되었는데, 이쯤 되면 이 둘은 서로의 페르소나가 되었다 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싶다.
'폰' '분신사바' 등으로 우리나라 공포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던 안병기 감독도 오랜만에 '감기'라는 신작을 들고 나온다. 지난 해 전 세계를 강타했던 신종 플루 바이러스의 변이체가 소재로 배경은 제주도가 될 예정이다. 한 동안 제작에 집중하며 올 초 '과속 스캔들'이라는 흥행작을 냈던 그가, 제작자가 아닌 자신의 본업으로 다시 한번 성공적인 복귀를 할 수 있을 지 궁금하다.
'번지 점프를 하다' '혈의 누' '가을로' 등을 연출했던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 김대승 감독과, '피도 눈물도 없이' '주먹이 운다' '짝패' 등 선 굵은 영화들의 선두주자 류승완 감독 역시 놓칠 수 없는 신작을 준비 중이다.
김대승 감독은 '연인'이라는 멜로 영화를, 류승완 감독은 '부당거래'라는 범죄 스릴러물을 각각 제작 중이며, '연인'에는 백윤식 김미숙 한채영이, '부당거래'에는 황정민과 류승범이 캐스팅됐다.
한국 영화계의 전설, 임권택 감독은 올해 박중훈 강수연 주연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를 선보인다. 사진제공 AFP. ▶ 이어지는 거장들의 작품세계 한국 영화계의 살아 있는 전설 임권택 감독은 올해 101번째 작품을 선보인다. 임권택 감독과 유독 인연이 깊은 두 배우 박중훈과 강수연이 함께 작업하는 이 영화는 전통 한지를 소재로 장인들의 모습을 담게 된다. 올해 상반기 개봉을 목표로 막 촬영을 시작한 이 작품의 제목은 '달빛 길어 올리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노장 감독의 작품 세계를 다시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해진다.
'초록 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등 주옥같은 작품들로 일찌감치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창동 감독은 '시'라는 영화의 후반작업을 하고 있다. 새 영화 소식만으로도 국내외 영화계를 들뜨게 한 이창동 감독이 이번에는 또 어떤 작품으로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쓰게 될 지 자못 궁금하다. 주인공은 한국 영화의 황금기로 불리는 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하나였던 윤정희 씨로, '미자'라는 간병인 역을 맡아 오랜만에 스크린에 컴백한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영화사의 또 다른 큰 획을 그을 것으로 기대된다. 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하나인 윤정희 씨가 '미자'역으로 출연한다. ▶ 작가주의 감독들의 생존기
국내 극장가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그 작품성만은 크게 인정받은 작가주의 감독들의 영화 만들기는 올해도 계속된다. '여자, 정혜'와 '멋진 하루'로 해외 유수 영화제의 상을 여럿 거머쥐었던 이윤기 감독은 하정우 수애와 손을 잡고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피터팬의 공식'과 '판타스틱 자살 소동'으로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던 조창호 감독은 '폭풍전야'를 선보일 예정이다.
특히 '폭풍전야'는 배우 김남길이 선덕여왕으로 스타덤에 오르기 전 출연한 영화로, '출세한' 배우의 덕을 톡톡히 볼 것으로 기대된다. 상대역으로 출연한 황우슬혜 역시 최근 한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급상승시킨 바 있어 그야말로 행운의 영화라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올해 충무로에는 영화인들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짜내며 기획하고 개발한 참신한 영화들이 많이 있다. 높아진 한국 영화의 위상에 걸맞게 해외 시장을 겨냥한 합작 영화도 다수 눈에 띈다. 짧지 않은 잔혹한 보릿고개를 꿋꿋이 넘어 온 한국영화가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을 지, 경인년 냉정한 관객들의 평가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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