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본 이후에 여운이 길게 남고, 어떤 영화는 보는 동안만 재미를 느낀다. 짧은 설 연휴를 조금이나마 길게 기억하려면 여운이 길게 남는 영화를 선택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나중에라도 '지난 설에는 이런 영화를 봤었지' 라고 기억이 난다면 연휴가 짧았다는 것은 쉽게 잊히지 않을까?
한국 젊은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일본 영화감독 이누도 잇신(49) 감독의 신작이 3월 개봉된다는 소식이다.
'메종 드 히미코' '구구는 고양이다' 등 이누도 잇신 감독의 작품은 한국에 소개될 때마다 평단과 관객들의 열광적인 호평을 받아왔다. 이 감독은 일본에서는 '뉴웨이브' 세대의 선두주자로 손꼽힌다.
▶ 올해 일본 영화 기대작 '제로 포커스'
특히 '메종 드 히미코'과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는 흥행이나 규모로 따질 때 대작은 아니지만 잔잔하고 감동적이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한국에 '이누도 잇신 열풍'을 불러왔다. 짧은 설 연휴에 조금 특별한 기억을 남기고 싶다면 이누도 잇신 감독의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
잠시 신작 '제로 포커스'에 대한 얘기를 하고 넘어가도 좋겠다.
본디 저예산 영화를 주로 만들어 왔던 그가 사상 최초로 메이저 스튜디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연출한 작품이 '제로 포커스'다. 이 영화는 2010년 일본의 아카데미상 11개 부문 최다 노미네이트의 신기록을 달성했는데, 추리 문학의 대가 '마쓰모토 세이초' 원작을 기초로 삼은 미스테리물로 알려졌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1950년 등단해 40여 년 동안 1000편에 이르는 작품을 선보였다. 순수문학과 대중문학,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들며 광범위한 영역에서 업적을 남긴 추리 문학계 1세대 작가다.
전작의 흐름으로 살펴볼 때 이누도 잇신 감독이 '미스테리물'을 찍었다는 사실은 의외의 선택이다. 캐스팅도 눈여겨 볼만한데 일본의 청춘 톱스타인 '히로스에 료코'와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나카타니 미키', 그리고 '나를 둘러싼 것'으로 2009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기무라 타에'의 동시 등장만으로 이 영화는 큰 화제를 모았다.
과연 이 작품으로 조금은 침체한 일본 영화가 한국에서 되살아 날 수 있을지도 관전 포인트다.
▶ 독특한 소재를 보편적으로 소화해 내는 감독
이제는 이누도 잇신 감독의 대표작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미 스토리가 알려질 대로 알려진 '메종 드 히미코(이하 메종)'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이하 조제)'를 꼽았다(스토리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영화의 감동을 해치지는 않으니 스포일러는 아니라고 양해를 구하고 싶다).
'메종'의 게이 히미코는 결혼을 해서 딸까지 낳은 후 커밍아웃을 하고 집을 떠났다. 딸 사오리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 나중에 히미코가 차린 게이 양로원에서 병들어 누워있는 히미코와 사오리가 대면하게 된다. 히미코는 용서를 빌지 않는다. 사오리는 당장의 생활고와 히미코의 젊은 애인 하루히코의 설득으로 인해 히미코가 차린 양로원에서 일하면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던 아버지, 같은 부류의 게이들과 차차 친해지게 되고 그들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까지였다면 그저 따스한 이해와 온정의 영화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게이가 행복해지기 위한 '히미코의 집(메종드히미코의 뜻)'은 성전환 수술까지 마친 루비가 뇌졸중 후유증으로 뒷감당이 힘들어지자 아들 부부에게 넘겨버리는 것으로 그 바닥을 드러낸다.
늙어서 오갈 데 없는 게이들이 함께 모여서 산다는 낭만적 설정이지만, 결국 모여서 사는 것 이상의 돌봄이 필요하게 되자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에게 보내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오리는 분개해서 히미코의 양로원을 떠나고 만다.
'조제'는 어릴 때부터 장애로 인해 학교도 못가고 할머니와 살아온 조제와 건강하고 잘생긴 청년 쯔네오의 사랑이야기이다. 우연히 조제를 알게 된 쯔네오는 조제의 괴팍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조제가 좋다. 조제의 할머니는 언젠가 쯔네오가 떠날 것이라는 생각에 마뜩찮아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시간이 흐른 후 조제를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는 쯔네오는 조제를 떠난다.
평범하다 보니, 이들은 모두 자신이 만들었던 관계를 무너뜨린다. 메종드히미코는 더 이상 돌보기 힘들어진 게이를 아들에게로 보내버림으로서 결국 그 공동체의 한계를 드러내고, 쯔네오 역시 조제에게서 도망감으로서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그 사랑의 붕괴를 보이고 만다.
▶ 누구나 절망하고 붕괴한다, 그러나 세상을 버리지는 말자
하지만 그 붕괴에는 환멸이 없다.
우리는 히미코가(히미코의 애인인 하루히코가)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쯔네오가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잠시 분개하거나 '그럴 줄 알았어'라고 환멸을 보이지만 그것은 곧 씁쓸함으로 바뀐다. 어쩌면 우리 모두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다고 생각할 때 유지하지 못하는 주인공들에게 공감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에 환멸대신 씁쓸함이 남는다. 이누도 잇신은 쓰지만 삼키고 싶지 않은 감정을 우리 목울대까지 올려놓는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은 그 관계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한다고 해서 자멸하지 않는다. 루비를 떠나보내도 메종드히미코에는 게이들이 남아서 서로 말동무가 되어주며 살고 있다. 쯔네오가 떠나가도 조제는 혼자서 전동휠체어를 타고 꿋꿋이 살아간다. 쯔네오가 떠나갔다고 해서 조제가 쯔네오를 만나기 전과 같이 우울하게 살아가리라는 것은 어쩌면 두 다리로 걷는 사람들의 착각일지 모른다.
히미코와 조제는 동정이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다. 딸에게 백안시당하며 투병중인 늙은 게이, 라고 쓰고 보면 히미코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딸에게 끝까지 미움 받아도 싼 인물이지만, 한편으로 어디까지나 우아하고 꼿꼿하게 자신을 지켜나가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학교도 못 간데다 천애고아가 되고 남자친구 마저 떠나간 불쌍한 장애인'은 조제이면서 조제가 아니다. 조제는 괴팍한 할머니와 집안에서만 살아 사회성이 떨어지고 부드러운 맛이라곤 없지만, 떠나가는 남자친구에게 매달리기보다 의연하게 보내줄 수 있는 그런 여자다.
순수하게 불쌍함으로 뭉쳐진 동정도 없고, 아름다운 공동체가 깨진 것에 대한 환멸도 없다. 우리들의 실제 삶이라는 것과 어딘가 닮아있지 않은가. 등장인물들은 다들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어딘가 조금은 한심하고 마뜩치 않다. 하지만 그런 한심함이 그렇게 비난받을 만큼 드물지 않다는 것 알고 있지 않은가.
이누도 잇신의 두 작품의 매력이자 조금 어긋나는 지점은 등장 배우들이 너무 아름답다는 것이다.
츠마부키 사토시나 오다기리 죠같은 미남이라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못생긴 사오리 역할을 맡은 시바사키 코우도 그 역할을 소화하기엔 너무 예쁘고, 조제 역할의 이케와키 치즈루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조제'에서는 일본의 청춘스타 우에노 주리가 아주 평범한 조연으로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일본의 젊은 감독들의 영화들까지 한국의 고전이 되어가고 있다. '러브레터'의 이와이 순지 감독에 이어 이누도 잇신은 그 두 번째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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