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트 로커, 아바타 핵뇌관 제거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9일 03시 00분


작품-감독상 등 6개부문 수상

《세계 영화시장을 점령한 ‘아바타’ 핵폭탄을 ‘허트 로커’가 무력화시킨 밤이었다. 7일 열린 제8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 각본 등 6개 부문을 석권한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허트 로커’는 미군 폭발물 제거부대를 소재로 한 영화. 1998년 ‘타이타닉’에 이어 다시 한 번 시장과 아카데미를 모두 제패하려 했던 ‘아바타’의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세 번째 아내였던 비글로 감독의 영광 뒤에서 ‘흥미로운 배경’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아바타’ 캐머런의 前부인 비글로 감독
흥행실패 8년만에 복귀 ‘화려한 부활’

제프 브리지스-샌드라 불럭 첫 주연상

○ “네, 마침내 ‘때’가 왔습니다.”

감독상 시상자로 무대에 오른 배우 겸 감독 바브라 스트라이샌드(68)는 수상자를 호명하기 직전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아카데미는 1929년 첫 시상식을 연 이래 단 4명의 여성만을 감독상 후보 명단에 올렸다. 1977년 ‘세븐 뷰티스’의 리나 베르트뮐러, 1994년 ‘피아노’의 제인 캠피언, 2004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딸인 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로 감독상에 도전했지만 모두 수상에 실패했다.

비글로 감독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며 “뭐라고 감정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고 소감을 밝혔다.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그는 ‘여성 최초의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이라는 사실엔 덤덤해 보였다. 비글로 감독은 “나는 ‘첫 여성 감독상 수상자’이기 전에 그저 한 사람의 영화감독”이라며 “언제나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고려할 가치가 없는 말인지 후배 감독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오늘 나의 성취가 여성과 남성을 막론하고 많은 젊은 영화감독의 의욕을 북돋우는 소식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장 182cm의 장신인 비글로 감독은 1983년 장편 데뷔한 이래 ‘여성성’을 주제로 내세운 영화는 만든 적이 없다. 1990년 제이미 리 커티스가 주연한 ‘블루 스틸’, 다음 해 키아누 리브스, 패트릭 스웨이지와 함께 만든 ‘폭풍 속으로’는 모두 남성 호르몬이 스크린 밖으로 넘쳐 나오는 듯한 범죄액션영화다.

1995년 내놓은 사이버펑크 공상과학(SF)영화 ‘스트레인지 데이스’와 러시아 핵잠수함 이야기를 그린 2001년작 ‘K-19 위도우메이커’는 흥행에 실패했다. ‘허트 로커’는 8년 만의 복귀작이다.

○ ‘아바타’의 굴욕… SF 징크스 넘지 못해

1월 역대 세계 흥행 최고기록을 경신한 3차원(3D) 입체 블록버스터 ‘아바타’는 지난달 ‘영국 영화 및 TV예술 아카데미(BAFTA)’ 시상식에 이어 ‘허트 로커’와의 맞대결에서 완패했다. 두 영화는 BAFTA에서도 나란히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지만 ‘허트 로커’가 작품 감독 각본 등 주요 6개 부문 상을 가져간 반면 ‘아바타’는 시각효과 등 2개 부문 수상에 그쳤다. 세계 영화산업의 구세주로까지 평가받았지만 시각적 기술혁신과 관련된 상만 받은 것이다.

아카데미는 전통적으로 SF 장르 평가에 인색했다. 지금까지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SF영화는 ‘시계태엽 오렌지’ ‘스타워즈’ ‘ET’ 등 3편뿐이었으며 모두 수상에 실패했다. 최근 20년간 박스오피스에서 좋은 성적을 낸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차지한 경우는 5번뿐이었다.

이날 시상식장에서 캐머런 감독은 마침 비글로 감독의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주요 부문 수상자로 비글로 감독이 호명될 때마다 그는 “예스, 예스”라고 환호하며 큰 웃음과 박수를 보냈다. 그는 이혼 뒤에도 비글로 감독과 영화 제작에 협력하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생애 첫 여우주연상을 받은 샌드라 불럭.
생애 첫 여우주연상을 받은 샌드라 불럭.
○ 하루 만에 ‘최악’에서 ‘최고’가 된 샌드라 불럭

‘블라인드 사이드’로 생애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탄 샌드라 불럭(46)은 하루 앞서 열린 제30회 골든라즈베리상 시상식에서는 ‘올 어바웃 스티브’로 주연상 수상자에 선정됐었다. 24시간 만에 ‘최악의 배우’와 ‘최고의 배우’ 평가를 오간 셈. 같은 배우가 한 해에 골든라즈베리와 아카데미 주연상을 모두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불럭은 1994년 액션영화 ‘스피드’로 스타덤에 올라 ‘당신이 잠든 사이에’ 등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 활약했다.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크래쉬’(2005년)로 연기 변신을 꾀했지만 같은 해 ‘미스 에이전트 2’가 흥행에 참패한 뒤 슬럼프에 빠졌다. 수상작인 ‘블라인드 사이드’에서 그는 10대 고아를 입양해 스타 스포츠 선수로 키워 내는 여인 역을 맡아 그동안의 가벼운 이미지와 다른 ‘연륜’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불럭은 시상식 전 레드카펫 행사에서도 우아한 은회색 드레스를 입고 나와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제프 프리지스(61)는 ‘크레이지 하트’에서 한물간 가수 역을 연기해 네 번째 도전 만에 첫 남우주연상을 안았다. 1971년 ‘라스트 픽처스’로 처음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지 39년 만. 그는 “연기의 모델이 돼 준 밥 딜런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 아쉬운 주연들
클루니-프리먼 “주연상 참 힘드네”
스트립, 16번째로 후보 올라 ‘최다’


여러 영예의 수상자를 배출한 올해 아카데미상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아쉬움을 안고 식장을 나선 화제의 주인공들을 낳았다.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의 ‘인 디 에어’는 이번 아카데미상 시상식의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단 한 개의 트로피도 건지지 못했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 경력이 있는 조지 클루니(49)와 모건 프리먼(73)에게 남우주연상은 올해도 ‘남의 떡’이었다. 클루니는 ‘인 디 에어’에서 담백하고 노련한 연기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크레이지 하트’에서 능청스럽게 주연에 몰입한 제프 브리지스를 넘어서지 못했다. 클루니는 2006년 ‘시리아나’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탔다.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첫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를 연기한 프리먼 역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의 기대가 깨졌다. 그는 2005년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탔다.

샌드라 불럭(46)과 함께 유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2파전 구도를 형성했던 관록의 여배우 메릴 스트립(61)도 올해 고배를 마셨다. ‘줄리&줄리아’에서 전설적인 프랑스 요리사 줄리아 역을 맡은 그는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생애 16번째로 연기상 후보에 올라 역대 최다 연기상 후보의 기록을 세웠다. 스트립은 이미 1980년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로 여우조연상, 1983년 ‘소피의 선택’으로 여우주연상을 탄 적이 있지만 27년 만에 다시 여우주연상을 타는 영광을 재현하진 못했다.

지난해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로 여우조연상을 탔던 페넬로페 크루스는 올해에도 ‘나인’으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화려한 와인색 드레스가 무색하게도 객석에서 박수만 쳐야 했다. 여우조연상을 받은 모니크는 새파란 드레스에 풍만한 몸매를 드러내 주목받았다. 그는 “(1940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흑인 최초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던) 해티 맥대니얼이 당시 시상식에서 입었던 파란 드레스를 따라 입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시상식에선 무대에 영화 ‘아바타’ 속 원주민 나비족이 올라 눈길을 끌었다. 코미디 배우 벤 스틸러가 피부를 파랗게 칠하고 긴 머리를 땋아 내린 가발을 쓴 채 분장상 시상자로 등장한 것. 그는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배우 호아킨 피닉스를 흉내 낸 분장을 한 채 시상을 했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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