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빈 - 조인성 연기 띄우는 ‘명품조연’으로 두각
“흉내 안통하는게 연기… 한계 알아야 더 잘해요”
나이 마흔에 첫 주연. 욕심은 없었다. 부럽지도 않았다. ‘이웃집 남자’의 윤제문은 “주연 처음 해보니 한 구석만 파고드는
조연과 달리 풍부하게 다면적으로 궁리하는 재미가 쏠쏠하더라”고 말했다. 변영욱 기자
《“어! ‘아이리스’ 박 실장이다.”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1층 로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배우 윤제문(40)을 만난 것은 18일 개봉한 ‘이웃집 남자’ 때문. 하지만 드라마 ‘아이리스’가 끝난 지 3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는 주인공 커플을 끝까지 돕던 ‘믿음직한 박 실장’으로 통했다. “드라마 하고 나서 사는 게 많이 달라졌어요. 생판 모르는 아주머니 아저씨가 반갑다며 인사를 건네니…. 동네 마트 나갈 때도 거울 한 번 더 보게 되죠.”》
TV를 통해 뒤늦게 얼굴을 알렸지만 대학로에서 윤제문은 15년 경력의 중견배우다. 1999년 박근형 연출의 ‘청춘예찬’이 출세작. 2002년 영화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해 최근 5년 새 개봉한 흥행작 다수에 비중 있는 조연으로 등장했다. ‘마더’의 원빈, ‘우아한 세계’의 송강호, ‘괴물’의 박해일, ‘비열한 거리’의 조인성이 모두 그의 탄탄한 ‘배경 연기’ 덕을 봤다.
카메라의 초점에서 줄곧 한발 비켜나 있던 그는 ‘이웃집 남자’에서 생애 처음으로 스크린 중앙에 섰다. 타락한 부동산업자의 인생역전과 몰락을 그린 이야기. 정글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음과 표정을 딱딱하게 굳혀버리고 나쁜 짓도 마다하지 않는 주인공 상수는, 그냥 딱 윤제문이다.
“인상이 험악하다고요?(웃음) 믿을지 모르겠지만 과격한 성격 전혀 아니에요. 생긴 게 이래서 험악한 역할만 들어오는데…. 뭐, 별로 신경 안 씁니다. 그냥 주어지는 대로 하는 거죠.”
나이 먹어 터지는 울음은 늘 뜬금없다. ‘이웃집 남자’의 주인공 상수도 마찬가지. 윤제문은 “아주 오래전에 아내랑 다투다 한
번 운 뒤로 울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사진 제공 루믹스미디어 사실은 믿기 어려웠다. 그의 인상은 얼굴을 알아보고도 선뜻 다가가 아는 척하기 망설여질 정도로 우락부락하다. 영화에서 보여준 자연스러운 연기도 그런 이미지를 굳혔다. 윤제문은 대개 주인공을 죽도록 괴롭히는 역할을 했다. ‘비열한 거리’가 개봉한 뒤 술 먹다 만난 옆 테이블 ‘어깨’들에게서 “우리 쪽 일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싸움을 못해서 늘 얻어맞으며 자란 기자는 그의 인상에 대해 물고 늘어지면서 마른침을 여러 번 삼켰다.
“싸움 많이 했냐고요? 에이 참…. 중고등학교 때 싸움 안 해본 남자 있나요. 공부 안 했지만 막 나가는 놈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조용히 학교 다녔어요. 클래식기타 치면서.”
―클래식기타? 안 어울리는데….(꿀꺽)
“류승범 씨가 영화 ‘품행제로’에서 여학생한테 잘 보이려고 기타 배우잖아요. 나도 그랬어요. 고1 때 미팅에서 만난 애가 ‘나는 기타로 로망스 치는 남자가 멋있더라’고 하는 말 듣고 덜커덕 학원에 등록했죠.”
그 여학생과는 잘 안 풀렸다. 하지만 기타가 좋아서 3년 내내 끌어안고 다녔다. 군 입대 전 프로 연주가를 무작정 찾아가 초보자를 가르치며 레슨을 받기도 했다.
“3개월 다니다 그만뒀습니다. 학원이 서울 강남에 있었는데 문하생들이 하나같이 폼 나는 외제 기타를….(웃음) 내 것은 아르바이트 해서 겨우 장만한 중고였거든요. 어느 날 그냥 ‘에이 안 해!’ 그러고 나와 버렸죠.”
한번 품은 음악 욕심은 엉뚱한 길로 튀었다. 대금 연주자 이생강 씨(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를 찾아간 것이다.
“그냥 끌렸어요. 국악협회에 전화해서 대금 배울 곳을 물었더니 알려주더라고요. 창덕궁 쪽에서 학원을 열고 계셨죠. 민요로 시작했다가 제법 수월하게 배웠는지 한 달 만에 산조를 들어갔습니다. 6개월 하고는 지방공연 무대에 같이 올라갔어요. 제자 열댓 명 사이에 묻어간 거지만요.”(웃음)
음악은 좋았지만 할수록 답답했다. 한계를 느껴 속만 끓이고 있을 때 우연히 처음 만난 연극 ‘칠수와 만수’가 인생을 바꿨다. ‘이거다’ 싶어 또 무작정 찾아간 대학로가 윤제문의 보금자리가 됐다. 그는 “음악은 한계를 알면 괴로워지지만 연기는 한계를 알아야 더 잘할 수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흉내 내기가 안 통하는 게 연기니까요. 캐릭터가 어딘가에 있다면 나도 딱 거기 있어야 해요. 영화에서 상수는 버릇처럼 ‘돈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말했지만…. 돈보다 중요한 거. 엄청 많죠. 내 경우에는, 이기적인 남편 이해해주는 집사람, 두 딸, 그리고 겨우 찾아낸, 목숨 같은 연기. 상수도 아마…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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