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일 서울 이화여자 고등학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영화 \'반가운 살인자\'의 제작보고회에서 김동욱(왼쪽), 유오성이 포토타임을 갖다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진환 기자
다세대와 아파트가 섞여 있는 언덕배기 동네. 장대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미치광이 살인자가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구불구불 좁은 골목길을 휘젓고 다닌다. 한 달 사이 대여섯 명의 여성이 무참히 살해되지만, 경찰은 단서 하나 찾지 못한다. 주민들은 살인사건 때문에 집값 내려간다며 경찰서 앞에서 데모를 벌이고, 경찰은 결국 1억 원의 현상금을 내건다.
영화 '반가운 살인자'(감독 김동욱)는 현상금을 노리는 동네 백수 영석(유오성)과 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신출내기 형사 정민(김동욱)이 살인자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렸다.
장르를 따지자면 '추격 코미디'라고 할까. 영화는 스릴러와 코미디, 휴먼드라마를 적절히 비벼냈다. 속도감 있는 추격 장면, 처참한 살인 현장은 기존의 범죄 스릴러를 연상케 하지만, 실마리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사건의 해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화면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그려내는 데 더 주안점을 뒀다.
주인공 영석과 정민은 사회적인 시선으로 보면 '루저'(패배자)에 가깝다. 2년 전 사업에 실패하고 백수가 된 영석은 아내와 고등학생 딸아이에게 '없는 사람' 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다. 노숙 생활을 하다가 집에 들어온 지 3개월 남짓 됐으나 아내는 아직도 실종 신고를 거두지 않고 있다. 꼼꼼하게 살인의 단서를 찾아다니다 돌아온 어느 날 누운 남자의 등에 아내의 차가운 말이 비수처럼 꽂힌다. "집구석에 가만히 있지 어딜 돌아다녀, 등신아! 이럴 거면 왜 돌아왔어. 차라리 어디 가서 죽어버리지."
형사 정민은 경찰서의 문제아다. 버스 정류소에서 담배를 피우다 시민에게 걸려 제보 당하고, 형사 반장(김응수) 말은 도무지 들어먹지 않아 미운털이 콕콕 박혔다. 경찰 노릇 하기 싫다고 몰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들킨 적도 있다. 아파트 부녀회 총무인 엄마가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 경찰청 앞에서 "무능 경찰 물러가라"는 시위를 벌이자 끌어내려다 '폭력 경찰' 누명을 쓰고 시위대에게 먼지가 나도록 두들겨 맞기도 한다.
지난해 11월 20일 촬영을 개시해 겨우내 살인자를 쫓은 두 남자, 유오성과 김동욱을 22일 O2가 만났다. 시사회와 기자간담회를 연달아 치룬 두 배우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즐겁게 인터뷰에 응했다.
▶미 CSI(과학수사대)급 백수로 돌아온 유오성, '깝' 형사로 첫 주연 된 김동욱
영화 '반가운 살인자'에서 꼼꼼한 성격의 수준높은 추리력을 갖춘 백수 영석을 연기한 유오성 '형사 같은 백수' 역할을 맡은 유오성은 눈빛이 참 대단한 배우다. 소위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撤)할 정도. 관록 있는 배우답게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했다.
영화 '국가대표',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 등 발랄한 역할을 주로 했던 김동욱은 실제로는 수줍음이 많은 청년이다. 영화 속에서는 옆집 동생 같은 귀여운 이미지였으나, 실물은 대단한 '꽃미남'이다.
-첫 공개인데 어떤 기분이 들었나. "우리 영화가 추격 코미디입니다. 코미디지만 너무 가볍지 않게, 진지하게 가려고 했지만 기자 시사회라 그런지 반응이 무거워서 걱정됩니다." (유) "저는 막상 보니 기분이 좋았어요. 생각보다 웃음도 많이 나오고."(김)
-제목에 살인자가 나와서 스릴러로 오해하는 관객도 있을 것 같다. "살인자라는 단어 자체가 영화의 제목으로 쓰인 경우는 드물 겁니다. 제목 때문에 제작진이 장소 섭외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해요." (유)
-최근 여성 대상 살인 사건이 잦아져 영화 홍보에는 반갑지 않을 것 같다. "김길태 사건이 있었죠. '반가운 살인자'라는 제목이 거부감을 줄 수도 있을 테고, 다르게 보면 시류에 편승한 영화로 오해받을 수 있어요. 현실은 더 살벌한 문제이기 때문에 영화와는 다르다고 선을 긋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강력 범죄가 자주 발생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에 여유가 없다는 것이죠. 근본 원인을 따지자면 가정의 붕괴라고 생각해요. 가족 구성원 소통의 부재 같은. 저희 영화에서도 부모 자식 간의 갈등이 나와요. 스릴러 코미디지만 세태를 반영했다고 봅니다." (유)
-유오성 씨는 '주유소 습격사건' 이후 오랜만에 코믹한 백수 캐릭터에 도전했다. 힘들진 않았나. "백수는 일상적인 제 생활입니다. 연기자라는 게 연기를 하지 않을 때에는 자연스럽게 백수가 되잖아요? 있는 그대로의 저를 투영하려 했습니다. 게다가 영석은 포상금 때문에 살인자를 잡아야 하는 인물이죠. 저 역시 아들을 둘 키우는 가장으로서 자식을 위해 희생하려는 부모의 마음을 알고 있어서 많은 부분 공감이 갔어요."
-후배 연기자들이 유오성 씨를 많이 무서워한다고 들었다. 평소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타격이 있는 건 아닌가. "촬영을 하면서 오히려 제가 더 눈치를 봤어요. 동욱 씨가 워낙 스케줄이 빡빡해서 혹시 빗길에 자동차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제발 무사히 다니게 해달라고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 "엉덩이 관리 받고 노출할 걸" "여장 힘들어"
-병원에서 주사 맞는 장면에서 김동욱 씨가 엉덩이를 노출하던데, 최초로 노출 신을 찍은 소감은 어땠나. "간호사 역할을 한 배우가 친한 학교 선배인데, 영화를 찍으면서 오랜만에 만났다. 그런데 만나자마자 엉덩이를 노출해서…. 막상 화면으로 보니 아쉽기도 해요. 피부 관리도 받고 대비를 했어야 했는데, 다음 기회에는 제대로 노출해 보겠어요!"
옆에 있던 유오성은 "노출 때문에 이제 많은 여자들이 김동욱의 매력에 갇힐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김동욱 씨는 매를 맞는 신이 유독 많았다.
"아무래도 아주머니들에게 맞는 장면이 제일 아팠어요. 전문적인 연기자가 아니라서 합을 맞추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죠. 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서…." (김) "전문가 아닌 분들과 찍은 거니까 동욱 씨도 일정부분 포기하고 찍었을 거예요."(유)
경찰서 앞 데모대에게 두들겨 맞는 형사 김동욱 김동욱에게 노출신이 있었다면 유오성에게는 여장 연기가 있었다. 살인자가 비 오는 날 여자들만 골라서 살인한다는 것을 알고 유오성은 살인범을 만나기 위해 여장을 감행한다. 치마를 입고 속눈썹 한 올까지 마스카라로 곱게 단장한 유오성이 밤길을 나서지만, 그의 뒤를 밟는 건 형사 김동욱이다.
-유오성 씨의 여장 모습이 인상적이다. "아이고 여성이 참 대단합니다. 스타킹 촉감도 이상하고, 하여간 이상한 것 천지였어요. 제가 여장이 어울리는 꽃미남 스타일은 아니라서 혹시 관객들이 부담스러워 하면 어쩌나 걱정도 많이 했는데, 상상한 것보다는 낫네요. 약간 어설프긴 한데 그것도 영석이가 능수능란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표현한 것 같아 좋습니다."
연쇄살인범을 만나기 위해 여자로 변장한 유오성. -김동욱 씨에게 묻겠다. 유오성 여장 점수는? "제 심경이 영화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혹여 피해자가 될 뻔한 여자인 줄 알고 따라갔다가, 유오성의 얼굴을 확인한 김동욱은 거침없이 그의 얼굴에 '핵 주먹'을 날린다.
▲“김동욱 엉덩이 매력, 여심 흔들 것”
▶ 늘 비가 내린 촬영 현장에서…
만약 두 사람이 영화 속처럼 골목길에서 실제로 살인자를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 그것도 현상금이 아주 많이 붙은 살인자를 만난다면.
두 사람 모두 싫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만나지 말아야죠. 저는 연기나 하고 살렵니다. 영화라는 게 현실을 극대화하는 작업이잖아요. 영석이라는 인물이 현상금에 목숨을 걸지만, 저는 그런 건 싫어요. 살인자를 만나면 죽음이 느닷없이 오지 않을까요. 억만금을 줘도 싫어요. 싫어." (유)
"오래 살아야죠. 못 본 척하지 않을까 싶어요." (김)
-김동욱 씨는 주로 밝고 개구진 역할을 연기한다. 캐릭터가 굳어지는 게 싫지 않나.
"제 몫이죠. 굳이 그걸 벗어나려 파격적인 시도를 하고 싶지 않아요. 작품을 골라서 하는 건 아니고, 욕심이 나는 작품, 사람과 작업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연기를 통해 제가 구축한 이미지니까 자연스러운 거죠. 앞으로도 지금처럼 할 겁니다. 다른 작품에서 다른 이미지를 최선을 다해 소화해 낸다면 그때 자연스럽게 다른 이미지도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빗속 살인사건을 다루다 보니 촬영장은 늘 폭우 속이었다. 소방서에서 공수한 대형 살수차는 배우들의 얇은 옷을 전부 적실 정도로 물을 쏟아냈다. 한 겨울에 초봄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었으니 배우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연쇄살인범을 만나기 위해 여자로 변장하고 길을 나선 유오성. -촬영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 "추운 겨울날이라 비를 뿌리면 바로 얼어서 고드름이 됐어요. 고드름을 불로 녹여 가면서 촬영을 했어요."(김) "맨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장면이 있는데, 냉기가 올라오는 걸 버티는 데 한계를 느꼈어요. 그 와중에 '대사가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가. 서서 연기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가'라면서 앞으로 더 열심히 연기하겠다고 마음먹었죠." (유)
▶ 집에서 유오성은 두 아이의 자상한 아빠, 김동욱은 과묵한 아들
-연기파 중견배우 송옥숙이 극 중 김동욱과 티격태격하는 엄마 역할로 우정 출연했다. 아역배우 심은경은 유오성의 딸로 나와 감동적인 부녀 연기를 펼쳤다. 유오성 씨는 집에서 어떤 아빠인지, 김동욱 씨는 어떤 아들인지 궁금하다.
"나름대로 자상한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4살 아들이 이틀 전에 TV를 보다가 그러더군요. '아빠, 우린 친구야!' 아이들이 커가면서 부모가 인생의 선배가 되죠. 좋은 길잡이가 되려고 해요."(유)
"집에서 아버지께 말을 편하게 못 하는 편이에요. 많이 모자란 아들이죠. 그렇다고 정신적으로 모자란 건 아니고. 저희 어머니는 영화 속 엄마와 똑같아요. 어머니 성격이면 더욱더 당당하게 외치셨을 겁니다. '무능 경찰 물러가라!' 하하." (김)
끝으로 배우로서 서로 평가해 달라고 했다. 두 사람은 이번 작품에서 처음으로 연기 합을 맞춰봤다.
"쑥스러운데, 동욱 씨 같이 좋은 친구와 작업을 했다는 게 기뻤어요. 사람이 사람을 만나 하는 작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사람 사이의 신뢰잖아요? 그런 면에서 보람찬 작업이었어요."(유)
김동욱은 "제가 어떻게 감히, 선배님을…"라고 답변을 못 하다가 "또 기회가 닿으면 언제든지 반가운 마음으로 함께 하고 싶은 선배님…. 저도 그런 후배가 되고 싶고"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유오성은 "야, 너 왜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라며 핀잔을 준다. 유오성의 카리스마는 아직 죽지 않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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