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제정신인 타라는 딸 케이트와 함께 침대에 누워 이야기도 나누고 로드트립을 떠나기도 한다.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타라’의 한 장면.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아…."
노래 '가시나무'는 외로운 한 인간의 번민을 노래하고 있다. 미국의 유료채널 쇼타임(Showtime)에서 방영하는 TV시리즈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타라(United States of Tara)'를 보면서 노랫말의 의미와는 무관하게 제일 먼저 이 가사가 생각났다.
제목부터 살펴보자.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타라'
미국의 정식국가명인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가 연상되지만 여기서의 '스테이츠'는 미국의 행정구역인 주(州)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중인격장애를 겪는 주인공 타라(토니 콜레트 분)의 다양한 인격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TV시리즈의 제목을 재미없게 직역하자면, '타라의 다양한 정신상태'가 되지 않을까? 제목은 뻔해 보이지만 사실 이 TV시리즈는 해리성정체장애를 겪는 한 여인이 정상인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부담 없게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 전업주부, 반항기 많은 10대 소녀, 베트남 참전 마초까지 한 몸에…
캔자스의 교외를 배경으로 하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타라'는 비디오카메라 앞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타라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내가 멀쩡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까…"라고 말문을 여는 타라는 자신을 제외하고도 4개의 인격을 더 가지고 있다. 타라가 앓고 있는 해리성정체장애(DID: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는 다중인격장애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알려졌는데, 타라는 비디오를 녹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활발하고 발랑 까진 15살의 소녀 T의 인격으로 전환된다.
T는 타라의 딸 케이트의 방에 가서 끈팬티에 스키니진, 탱크탑까지 걸치고, 디스코머리를 묶고 막대 사탕을 빨며 케이트를 기다린다. 그때 마침 학교를 다녀온 케이트는 "T, 너구나!"라며 반갑게 인사한다. 다른 인격이 나타나도 마찬가지. 타라에게는 1950년대 풍의 전통주의를 고집하는 전업주부 '앨리스'의 인격과, 베트남전에 참가한 참전용사 '벅'이라는 남성인격까지 모두 3개의 인격이 더 존재하는데 가족들은 마치 늘 만나는 사람처럼 그 인격들을 맞이한다.
타라의 다양한 인격 (왼쪽부터) 벅, 앨리스, 타라, T.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타라’ 포스터.
한때 타라는 약물치료에도 기댔었지만, 그 역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만두었다. 그러니까 정신력 말고는 따로 타라를 지켜줄 방도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건 타라의 가족들이다. T가 나타났을 때, 타라의 딸인 케이트가 반가워했던 것처럼, 그들은 타라의 인격을 인정하고 (때로는) 사랑해준다. 앨리스와 T는 간혹 타라의 헌신적이고 이해심 많은 남편 맥스(존 코버트)를 수차례 침실에서 유혹하곤 하는데, 사실 자기와 결혼한 여자의 몸인데도, 다른 인격과 성관계를 맺는 것을 타라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맥스는 점잖게 거절하곤 한다. (그래서 맥스 혼자 샤워실에서 욕구를 해결하는 장면이 TV에 나오기도!!! '역시 미국'이라기보다는 '역시 케이블 채널'이라는 생각이 든다.)
타라의 여동생 샤마인(로즈마리 드윗)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언니 때문에 부모로부터, 그리고 또래 남자아이들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관심을 놓쳤단 생각에 타라의 장애가 모두 연기라고 생각하지만, 샤마인 역시 타라가 T가 되어 가출하거나 벅이 되어 사고를 칠 때면 투덜거리면서도 혹시 밖에 나가 다치거나 상처받지 않을까 찾아 나선다.
물론 이해심으로 중무장한 타라의 가족 역시 건강하다고 하기는 힘들다. 남편이야 자기가 선택한 여자인데다가 사랑하니까 이해한다고 해도, 한번은 또래 친구인척, 한번은 엄격한 엄마인척, 또 한번은 저질 농담을 입에 걸고 다니는 마초인척 하는 엄마를 아이들이 언제나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케이트가 말대답하는 것에 화가 난 앨리스가 비누로 케이트의 입을 씻어버린 에피소드와, 게이 성향을 보이는 아들 마샬의 짝사랑 상대를 T가 유혹해 키스하는 걸 들킨 사건 등 타라의 다른 인격들이 망쳐놓는 가족의 일상은 열손가락에 열발가락을 대동해도 다 세기 힘들 정도.
이런 타라를 못미더워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아이들을 데려가겠다고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그 사건은 숨어있던 또 다른 인격 '김미'가 밖으로 나오게 하는 계기가 된다. 김미는 이제까지 존재했던 다른 인격들과는 다르게 원시적인 존재로, 타라의 아버지가 잘 때 그 위에 오줌을 누어 마치 아버지가 이불을 적신 것처럼 함정을 파놓는 교활함도 갖추었다.
이웃집에 사는 남자의 자살은 타라가 다시 다중인격장애로 돌아가게 만든다.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타라’ 시즌2의 한 장면.
▶ 끝난 줄 알았지? 시즌2에서 한층 복잡해지는 타라의 인격들
2009년 1월 쇼타임 홈페이지에서 파일럿 에피소드를 무료 스트리밍하며 상당히 우호적인 반응 속에 출발한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타라'는 2010년 3월22일 시즌2를 출항시켰다. 모두 12개 에피소드로 구성됐던 시즌1은, 타라가 기숙학교에 다니던 고등학교 시절 데이트 강간을 당했다는 걸 기억해내며 그녀가 겪는 다중인격장애의 원인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정신병원에서 의사와 상대방의 가족을 대동하고 그날의 진실을 마주했던 타라는 그 뒤 3개월간 아무런 인격 전환도 겪지 않으면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덕분에 가족들의 삶도 평온해졌다. 그러나 가족 모두가 볼링장에서 공을 굴리며 환호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 시즌1은, 볼링장 곳곳에 타라의 다른 인격들(앨리스, T, 벅, 김미)를 감춰놓음으로써 타라와 그 가족들의 고통이 끝나지 않았음을 예고했다.
그리고 시즌2의 첫 에피소드의 끝에서 벅을 다시 꺼내놓음으로써 타라의 인격들이 다시 타라를 지배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줬다. 시즌2 첫 에피소드는 이웃에 사는 남자의 자살로 시작하는데, 우편물을 부탁한다며 유가족이 주고 간 열쇠를 받은 타라가 그 집에서 무언가 발견한 뒤 벅이 출연한다. 이전까지는 이렇게 저렇게 분위기만 험악하게 만들었던 벅은 이번엔 바에서 일하는 여종업원과 지속적인 육체관계를 시도해 타라를 곤란하게 만든다. 쇼타임 홈페이지에 예고된 바에 따르면, 타라, 앨리스, T, 벅, 김미라는 5개의 인격에 '쇼샤나'라는 새로운 인격이 추가될 예정이라고.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쇼샤나는 히피 성향의 중년 여성으로 심리치료사를 자처해 인격들과 타라와의 균형을 중재한다고 한다. 부디 앨리스처럼 얄밉거나, T처럼 방정맞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할리우드의 샛별 디아블로 코디와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의 만남
필자가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타라'라는 제목을 처음 접한 건 미국의 종합연예정보지 '버라이어티'에서 인물 동향을 살피던 중, '스티븐 스필버그'와 '디아블로 코디'가 함께 일할 예정이라는 뉴스를 봤을 때다. 스티븐 스필버그야 모르는 사람이 (아마도 거의) 없겠지만, 디아블로 코디는 신선한 이름일 거다. 국내에서도 꽤 인기를 얻었던 영화 '주노'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인데, 처녀작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코디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수상함만큼이나 놀라운 과거사를 밝혀 더욱 화제가 됐었다.
그 과거가 뭣인고 하니 한때 스트리퍼로 일한 경험이 있다는 것. 직업에 귀천은 없다지만 경력개발상 비약이 심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코디는 스트리퍼 경험을 블로그에 쏟아내는 블로거인 동시에 미디어에 관심이 많았던 예비 작가였던 것이다. '주노'를 본 스티븐 스필버그는 아이디어 수준으로 가지고 있던 이야기를 극화할 펜을 디아블로 코디에게 쥐어줬다. 비록 '죽여줘! 제니퍼'라는 코디의 2번째 영화가 기대 이하였기는 했지만,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타라'가 '디아블로 코디'식으로 재미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상식을 뛰어넘는 상황 설정, 금기시 여기는 소재를 긍정적으로 또 구체적으로 어둡지 않게 이끌어내는 이야기 솜씨, 그리고 현실에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천사 같은 가족들. 한 가지 더 기대한다면, '주노'에서 주노가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 내고 결국 한 뼘 더 성장한 것처럼 타라와 그녀의 가족들에게도 쓰디쓴 지난날을 인내한 덕분에 주어질 달콤함이 준비돼있으면 바라는 것이다.
물론 디아블로 코디, 스티븐 스필버그 말고도 드라마를 빛내는 별들은 많다. '섹스 & 시티'(TV)의 에이든에게 푹 빠졌던 언니들이라면, 하해와 같은 마음을 가진 남편으로 등장한 존 코버트가 반가울 테고, '매드맨'에서는 매력적인 화가를, '레이첼 결혼하다'에서는 상처를 감싸는 성숙한 맏언니를 연기했던 로즈마리 드윗도 눈에 익었을지 모른다. 타라의 딸과 아들을 연기하는 청소년 배우들도 제법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뮤리엘의 웨딩' '어바웃 어 보이'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팔색조처럼 다른 모습을 보여줬던 토니 콜레트의 신들린 인격전환 연기야말로 이 TV시리즈가 시즌2로 이어지게 한 일등공신일 거다. 그 공로를 인정받았을까, 토니 콜레트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타라'에서의 연기로 골든글로브와 프라임타임 에미 모두 연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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