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봉한 초대형 블록버스트 \'타이탄\'이 박스 오피스 1위에 오르면서 샘 워싱턴의 ‘흥행성’은 다시 한 번 입증됐다.
요즘 전 세계 극장가에서 가장 '핫'한 남자는 아마도 샘 워싱턴일 것이다. 그는 최근 영화 역사상 가장 큰 수익을 올린 '아바타'의 주인공이었고, 이어 지난주부터는 다시 초대형 블록버스터 '타이탄'으로 박스 오피스 1위에 올라있다. 현재로선 2010년 상반기 극장가를 홀로 평정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주 출신의 샘 워싱턴이 처음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작품은 지난 해 개봉한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터미네이터 탄생의 비밀을 쥐고 있는 마커스 라이트를 연기했다. 할리우드에서는 초짜 신인과 같았던 그에게 이런 행운이 돌아간 것은 당시 '아바타'를 촬영 중이던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추천 덕분이었다.
첫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였지만 워싱턴은 거장의 추천이 전혀 무색하지 않게 훌륭한 연기를 펼쳤다. 그가 맡은 마커스 라이트는 인간의 몸에 사이보그를 이식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형태의 터미네이터. 저항군에 잠입이 가능하도록 제작된 일명 '침투형 모델'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강한 인간의 심장을 가진 그는 인간의 편에 서서 저항군 지도자 존 코너(크리스천 베일 분)를 돕게 된다.
▶ '터미네이터' 통해 할리우드 무사 입성
결국 인간과 사이보그 간 싸움이 한 남자의 몸 안에서 압축되어 펼쳐지는 셈인데 이는 터미네이터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자 결말로 향하는 열쇠이다. 그 만큼 새롭게 투입된 마커스 라이트라는 배역은 전편에 등장해온 주인공 존 코너에 맞먹을 정도로 비중 있는 역할이었다. 동시에 사이보그의 몸을 가진 만큼 강한 전투력을 보여야 했고, 인간의 심장을 지닌 만큼 풍부한 눈빛을 보여야 했다. 검증이 안 된 신인에게 맡기기에는 판이 큰 도박이다.
그런데 워싱턴은 그 누구보다도 이 복잡다단한 마커스 역에 잘 어울렸다. 마치 배역에 캐스팅된 것이 아니라 배역이 그를 위해 창조된 것처럼 그의 카리스마는 상당했다. 그의 전투신은 '본 아이덴터티'의 맷 데이먼에 견줄 만 했고, 길들여지지 않은 눈빛은 정체성의 고뇌를 보여주기에 충분히 강렬했다. 일각에서는 존 코너를 연기한 크리스천 베일이 아닌 바로 샘 워싱턴이 이 영화의 진정한 구원자란 평을 할 정도였다.
'터미네이터'로 할리우드 신고식을 치른 샘 워싱턴은 '아바타'를 통해 소포모어 증후군을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군복을 펄럭이며 초토화된 LA 시내를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에는 원조 터미네이터인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모습이 겹쳐졌다. 감독이 이 영화는 '전편들에 대한 오마주'라고 밝힌 데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이는 4번째 에피소드인 이 작품이 지난 영화들의 프리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의도적 연출이었다 볼 수 있는데, 그 의도가 정확히 맞아 떨어진 것이다.
25년 전 충격적인 강인함으로 우리를 경악시켰던 터미네이터의 모습이 되살아난 듯한 이 장면은 제임스 캐머런이 떠난 후 도마 위에 올랐던 전편과의 개연성을 높이는 데에도 한 몫을 했다.
▶ '아바타'로 소포모어 증후군 극복
이렇듯 터미네이터로 인상적인 신고식을 치른 그의 다음 영화는 바로 '아바타.' 두말할 것 없이 여러 면에서 기념비적인 기록을 세운 영화다. 한국에서만도 관람객 수가 1330만(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을 넘었다. 장담컨대 '아바타'가 만든 기록을 넘어서는 영화는 앞으로 꽤 오랫동안(잘하면 영원히) 없을 것이다.
워싱턴은 '아바타'에서 주인공인 해병대원 제이크를 연기했다. 앞서 제이크 질렌힐과 맷 데이먼이 이 역을 거절한 것은 그에게 행운이었다. 행운이란 준비된 자에게는 엄청난 기회가 되는 법. 워싱턴은 자신에게 찾아온 이 행운을 일생일대의 기회로 삼았다.
당시 워싱턴은 성공적인 데뷔를 하긴 했지만 물음표를 떼기에는 이른 감이 있는 배우였다. 흔히 말하는 소포모어 증후군 역시 피하기 어려운 함정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워싱턴은 보란 듯이 이 작품으로 국제적인 스타대열에 안착한다. 그는 휠체어를 탄 해병대원과 나비족인 아바타 사이를 오가며 영화 구석구석을 뛰고, 고민하고, 싸우고, 사랑한다.
이 영화에서 워싱턴의 연기가 빛났던 것은 실재하는 지구인 제이크와 가상의 아바타라는 전무후무한 1인 2역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았기 때문이다. 지구인 제이크는 사고로 다리를 잃었는데 남자다움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해병대원으로서 다리를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반면 아바타로 연결되어 나비족이 될 때면 오히려 인간보다 우월한 신체적 자유를 얻게 된다. 그 사이를 오가며 점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돈을 느낄 때, 그리고 그에게 다리를 되돌려주겠다는 은밀한 유혹과 인간으로서의 도덕성 사이에서 고뇌할 때, 워싱턴은 힘줄을 불끈거리며 터프함만을 자랑하는 액션배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다.
영화 ‘아바타’의 촬영 현장에서 제임스 캐머런 감독과 주인공 제이크 설리 역의 샘 워싱턴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20세기폭스코리아 '아바타'는 영화의 신세계를 열었다는 극도의 찬사를 들으며 아직 많은 3D 상영관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숨 고를 틈도 없이 '타이탄'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신반인의 전사 페르세우스다. 이 영화는 현재 한국을 포함해 15개국에서 박스 오피스 정상을 달리고 있다.
▶ 극대화된 남성성, '타이탄'의 매력남
'타이탄'은 워싱턴의 남성적인 매력이 극대화된 영화라 할 수 있다. 남는 것 없는 단순 오락물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독보적인 워싱턴의 매력에 반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페르세우스는 신중의 신, 제우스의 아들이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인간인 양부모의 손에 길러졌고, 언젠가는 신들에 대항해 일어설 때가 올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사랑했던 양부모가 지옥의 신 히데스에게 죽임을 당하자 가르침대로 분연히 일어서며 외친다. "일어설 때가 되었다! 이제 신들에게 그만하라고 외칠 때가 되었다!"
다음은 예상하는 대로다. 그는 앞을 가로막는 거대 전갈의 몸통을 통째로 박살낸다. 무시무시한 메두사의 목도 단칼에 친다. 그리고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를 타고 신들도 무서워한다는 크라켄을 돌로 만든다. 액션 블록버스터의 미덕이 관객들의 아드레날린 수치를 올리는 것이라면, 워싱턴은 그 미덕을 한껏 발휘한다.
거친 숨을 내쉬며 포효하는 야성적인 얼굴이 클로즈 업 될 때면, 그가 이제 명실공히 할리우드의 가장 기대되는 블루칩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같은 호주 출신의 선배 스타인 러셀 크로우와 휴 잭맨의 다음 자리는 이미 워싱턴의 것이다. 아니, 그 자리를 넘어설 기세다.
영화 ‘타이탄’의 포스터. 사진 제공 올댓시네마 원래 그는 서핑을 좋아하는 평범한 벽돌공이었다. 배우가 된 것은 우연이었다. 그저 친구를 따라 호주국립공연예술학교(NIDA)에 지원했고(친구는 떨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 미스코리아들 스토리처럼), 이를 계기로 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98년 22살의 나이로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여러 편의 TV 드라마와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아찔한 십대(Somersault)' 라는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다. 10대 여주인공 애비 코니쉬의 상대역인 '조'로 출연한 이 영화는 그 해 호주영화협회에서 수여하는 13개 부문의 상을 싹쓸이했다. 이어 그는 AFI(미국영화연구소)로부터 최고의 남자 배우로 선정됐고, 호주의 한 영화잡지에서는 가장 촉망 받는 남자 배우로 손꼽혔다.
여세를 몰아 2006년에는 '007 카지노 로얄'의 제임스 본드 역을 놓고 다니엘 크레이그와 경합을 벌였지만 마지막 순간에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우리는 지난 2년간의 짧은 필모그래피만을 기억하나 사실은 오랜 동안 준비하고 단련한 베테랑 연기자였던 것이다. 그의 활약이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그의 성공이 단발성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도 여기에 그 이유가 있다.
▶ '최고의 배우', 그의 미래 과제는?
분명 과제는 있다.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최근의 세 작품 모두 그로서는 각각의 한계를 안고 있다. '터미네이터'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나 혼자만의 영화는 아니었고 '아바타'는 배우 샘 워싱턴보다는 감독 제임스 캐머런의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단독주연을 맡은 '타이탄'은 전형적인 팝콘 무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세편 모두에서 그는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터미네이터'에서는 반이 인간, 반이 로봇이었고 '아바타'에서는 반이 인간, 반이 외계인이었다. 그리고 '타이탄'에서는 반이 신이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그는 늘 반쪽으로 이루어진 전사였다. 더 이상 고착화된 이미지에 갇히기 전에 분명 다른 캐릭터로 거듭나야 할 때다. 어떻게 연기 폭을 넓히느냐가 앞으로의 연기 인생을 결정짓는 관건이 될 것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나는 유명해 지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그러길 원했으면 빅 브라더 쇼에 출연했겠지 (I didn't set out to be famous; if I'd wanted that, I would have gone on Big Brother.)'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그의 의지를 잠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행히도 그는, 스타가 아닌 배우가 되기를 원한다.
워싱턴은 '타이탄' 이후 벌써 다섯 편의 차기작을 확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우가 되길 원하는 이 남자,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그의 시대가 열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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