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안현진] 인간 방패 보디가드 ‘휴먼 타깃’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22일 15시 00분


변변치 않은 무기보다 훌륭하게 단련된 챈스의 몸이 바로 무기다.
변변치 않은 무기보다 훌륭하게 단련된 챈스의 몸이 바로 무기다.

말로 꺼내거나 글로 쓰기 전에 머뭇거려지는 표현이 있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빠르다 보니까 어느새 그 표현이 무색해졌기 때문인데, '영화 같다'는 말을 쓰려다 문득 그렇게 느껴진다는 걸 깨달았다. TV와 영화를 다른 미디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TV방송과 영화를 구분했던 기준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펙터클'이 있나 없나 였다.

그때는 화면비율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는데, 어쭙잖게 크고 가로가 긴 화면에서 폭탄이 펑펑 터지고 건물이 무너지는 등 '진짜 같은 가짜'를 보여주면 그게 '영화 같다'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도 서두가 길었다. 이 글을 통해 소개하려는 미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같다'는 진부한 설명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액션물, 미국 TV채널 FOX의 '휴먼 타깃'이다.

▶ 전직 암살자가 제공하는 밀착형 경호 서비스

'휴먼 타깃'의 제목은 전직 암살자였고, 현직 사설 경호원으로 활동하는 주인공 크리스토퍼 챈스(마크 밸리 분)를 이르는 말이다. 딱 떨어지는 검은 정장에 흰 셔츠, 검은 넥타이에 검은 선글라스, 이어피스를 꽂은 딱딱한 경호원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챈스의 친구이자 동업자인 윈스턴(치 맥브라이드), 그리고 게레로(재키 얼 할리)가 운영하는 이 비밀스러운 사설 경호 업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도배해서 "나 경호하고 있수-"라고 광고하기 보다는, 고객의 생활 안으로 섞여 들어가는 밀착형 경호를 제공한다. 다시 말하면 고객의 옆에서 '인간 방패'가 되어주는 것. 그렇다 보니 뒷전에서 사전 준비와 경호 진행, 위기 관리 등에 힘쓰는 윈스턴과 게레로와 달리, 챈스는 회사원, 변호사, 통역관, 파병된 군인, 수도사, 이종격투기 파이터 등 다양한 직종으로 매회 둔갑하곤 한다.

에피소드 마다 매번 새로운 인물로 변신해서 임무를 수행하는 걸 보는 건 분명히 '휴먼 타깃'의 재미지만, 처음에는 그게 무슨 재미인지, 앞으로도 계속 재미있을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무엇이 챈스를 그렇게 힘든 임무에 뛰어들게 하는지에 대한 설정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 더 솔직히 말하면 크리스토퍼 챈스를 연기하는 마크 밸리가 요즘의 TV스타들이 보여주는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상의만 벗으면 바로 이종격투기 선수가 되고, 군모를 씌우면 10년은 해외에 파병됐던 베테랑으로 보일 지경이니, 이 배우의 미덕이 섬세한 미모보다는 강건한 육체에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마크 밸리의 선 굵은 외모는 오히려 TV시리즈 속에서 크리스토퍼 챈스가 감춘 어두운 과거와 조응해서 이야기와 캐릭터를 충분히 조화시키는 상승효과를 연출했다.

\'챈스걸\'들은 에피소드 마다 로맨틱한 여운을 남긴다.
\'챈스걸\'들은 에피소드 마다 로맨틱한 여운을 남긴다.

▶ 달리는 기차에서 패러글라이딩하는 '영화 같은' 액션, TV로 들어오다

처음에 꺼낸 '영화 같다'는 이야기 역시 '휴먼 타깃'의 선 굵은 액션으로 설명이 될 것 같다. 에피소드마다 대단한 액션을 한 건 이상씩 보여주는 지라 이 자리를 빌어 일일이 꼽기는 힘들지만, 액션의 스케일로만 따지면 파일럿 에피소드가 그 중에서도 최고였다. 폭발물이 설치된 달리는 고속열차의 환기구 같은 좁은 공간에서 벌이는 몸싸움이 공간적 제약 덕분에 돋보였음은 물론이요, 기관차와 떨어진 뒤에도 더욱 가속해서 움직이는 열차의 추진력으로 패러글라이딩을 시도하는 장면 역시, 아무리 요즘이 사전제작이 활성화된 TV시리즈의 황금기라고는 하지만, 이전까지는 보기 힘들었던 장면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최첨단 무기나 눈이 번쩍 뜨이는 기기들, 영리한 잔머리를 이용하기 보다는 적절한 순간이 다가오길 참고 기다렸다가 무쇠 같은 주먹으로, (맞으면 정말 아플 것 같은) 팔꿈치와 허벅지로 상대의 취약한 부분을 가격하는 아날로그식 액션이 주는 쾌감 역시 '휴먼 타깃'이 보여주는 액션의 진정성에 무게를 더한다. 폭발로 등에 나무 파편이 꽂히는 사고나, 유리파편 위를 맨발로 걸어가는 일쯤은 아무렇지 않게 해치우는 모습을 보면, '다이하드' 시리즈의 브루스 윌리스, '레밍턴 스틸'의 피어스 브로스넌 등 1990년대 TV와 스크린을 수놓았던 알파메일이 재림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휴먼 타깃'은 프로모션용 포스터에서도 '007 제임스본드' 시리즈와 유사점이 있음을 시사했다.
'휴먼 타깃'은 프로모션용 포스터에서도 '007 제임스본드' 시리즈와 유사점이 있음을 시사했다.


▶ '24'의 잭 바우어, '007'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와 비교되기도

챈스가 '크리스토퍼 챈스'라는 이름 이전에 사용했던 이름은 '콘래드 홀'로, FBI 파일에 의하면 그는 공식적으로 'John Doe'(신원 미상의 남자에게 붙이는 이름)이다. 어린 시절 고아가 된 챈스의 본명은 그 스스로에 의해 봉인되었다. 갈 곳 없던 그를 거두어 키워준 사람은 '올드맨'으로, 국제적인 규모의 암살조직을 운영하는 거물. 그는 특별히 챈스를 아껴 그에게 자신의 성을 주고 조직을 계승하게 하려고 했으나, 챈스가 마지막 살인 미션의 대상이었던 캐서린과 사랑에 빠지면서 조직을 떠나고, 아버지와 다름없었던 '올드맨'을 배반하게 된다. 크리스토퍼 챈스라는 이름은 그때 찾아갔던 퇴물 경호원으로부터 얻은 이름으로, 대대로 스승에게서 제자로 비밀스럽게 이어져온 이름이다. "크리스토퍼 챈스는, 다른 사람이 돕지 못할 때 찾아가는 사람"이라고 설명되는데, 암살자로 살아가는 어두운 삶에 커다란 물음표를 그리기 시작한 그에게 새로운 삶을 출발할 수 있게 한 길잡이가 되었다.

이런 류의 첩보/경호물에서 로맨틱한 상황은 늘 발생하기 마련이다. 위험에 빠진 여주인공을 구해주는 남주인공이라니, 꼭 남자가 강건하거나 튼튼하지 않아도 사랑이 싹틀 수 있는 충분한 밑거름이다. 하지만 한 곳에 머물 수 없고 신변이 안전하기는커녕 배게 밑에 총을 두고 잠들어야 안심할 이 남자는 언제나처럼 캐서린에 대한 슬픈 기억으로 돌아갈 뿐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지 못한다. 아마 정장을 입지 않아도 크리스토퍼 챈스와 007 제임스 본드가 겹쳐보이는 이유는, 챈스가 제대로 잡지 못하고 스쳐 보내는 여자들이 많아서일지도 모른다. 간혹 어떤 비평가들은 크리스토퍼 챈스를 FOX의 인기 시리즈 '24'의 잭 바우어와 비교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휴먼 타깃' 쪽 주인공이 좀 덜 피곤해보여서 좋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비극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24시간 매분 매초 뛰고 구르는 걸 보는 건 사실 조금은 피곤하니까.

▶ 원작은 코믹스, 시즌2 방영은 아직 미정

'휴먼 타깃'은 지난 몇 년 간 할리우드를 강타했던 코믹스 원작의 영화화 유행이 오래 전부터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휴먼 타깃'은 1972년 12월 처음 연재를 시작한 동명의 코믹스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TV시리즈는 코믹스 '휴먼 타깃'의 주인공 캐릭터인 크리스토퍼 챈스를 빌려와서는 새로운 이야기로 시리즈를 꾸몄는데, 2010년 FOX의 '휴먼 타깃'이 만들어지기 10년쯤 전인 1992년 미국 방송사 ABC에서 같은 제목으로 TV시리즈를 시작한 전력이 있다. ABC의 '휴먼 타깃'이 7개월가량 방송된 뒤 마감했던 전력과 비교하면, 2010년의 '휴먼 타깃'은 파일럿 방영부터 시즌1을 마감하는 지금까지 비교적 우호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리고 시즌1의 파이널은, 윈스턴이 납치당하고 '올드맨'과 챈스가 오랜만에 다시 만나고, 또 챈스의 과거가 드러나는 등 '클리프행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했다.

윈스턴의 납치는, 챈스가 '크리스토퍼 챈스'라는 이름을 얻은 6년 전 그날로 돌아간다. 캐서린이 챈스의 절친한 동료이자 뛰어난 암살자였던 '밥티스트'에 의해 살해당하고, 윈스턴이 형사로서의 경력을 포기하고 챈스와 동업하기로 결심했던 그날. '올드맨'에게 캐서린의 암살을 사주했던 악당은 그날 이후로 어떤 물건(책)을 계속해서 추적해왔다. 그리고 그 추적은 6년이 지나 윈스턴, 챈스, 게레로가 아직도 그 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챈스로부터 그 책을 얻어내기 위해 윈스턴을 납치한 것. 책의 정체는 나오지 않으면서 자꾸 그 책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악당 덕분에, 영화감독 J. J 에이브럼스가 '미션 임파서블 3'에서 관객을 2시간 동안 쥐고 놀았던 '토끼발'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지만, 일단은 시즌2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말 안듣는 챈스와 시니컬한 게레로 사이에서 언제나 맘 고생이 심한 윈스턴이 안전하게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기를 바라며 말이다.

안현진 / 잡식성 미드 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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