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의 신작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마지막 장면. 반란군의 대장 이몽학(차승원)이 칼을 겨누며 ‘너는 누구냐?’ 고 묻자 견자(백성현)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 꿈 없는 개새끼.” 영화는 서로 다른 꿈을 가진 사람들(황정민, 차승원)이 세상과 대결하며 장렬하게 충돌하고 찬란하게 부서지는 이야기다. 백성현(22)이 맡은 역할은 세도가의 서자로 태어나 신분제 사회라는 벽에 갇혀 꿈조차 가질 수 없는 견자라는 인물이다. 반항심 가득한 눈빛, 절망어린 몸짓, 울분에 찬 절규로 견자를 스크린에 살려낸 배우 백성현. 아직 많은 이들에게 낯선 얼굴일지 몰라도 그는 올해로 연기 경력 16년차, 어엿한 중견배우다.
“이 길이 맞나, 의구심 벗게 해준 영화 <말아톤>... 조승우 같은 배우 되고 싶었다”
이웃집 아주머니(영화배우 이의정의 어머니)의 추천으로 여섯 살 때 아역배우가 됐다. 첫 출연작은 임성민과 최진실 주연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4)이었다. “너무 어렸을 때라서 잘 기억 안 나요. 단편적으로 드문드문 생각나는 정도죠.” 카메라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시키는 대로 곧잘 따라하는 똘망똘망한 그에게 드라마, 영화의 아역 출연 기회가 계속 이어졌다. 시청자들이 그를 알아보기 시작한 건 드라마 <다모> 이서진의 아역, <해신> 최수종의 아역, <천국의 계단> 권상우의 아역을 맡으면서. 단역이었지만 사람들 기억에 남았다. <천국의 계단> 시절 생긴 팬들이 지금은 회원 10만 명으로 커진 그의 팬 카페의 주춧돌이다. 고교 진학 후 처음으로 배우의 길을 계속 가야하나, 의구심이 들었다고 한다. 공부를 잘했던 그는 비평준화 지역인 광명시에서 상위권 인문계고에 진학했지만 연기생활과 병행하며 우등생 성적을 유지할 순 없었다. 연기생활에 회의가 들었다. “어린 마음에 연기 잘한다는 소리 들으며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좋아서 해왔지만 내가 이 길로 계속 가도 될 만큼 배우로서 자질이 있는 건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죠.” 그 즈음 <말아톤>에서 자폐아 형 조승우를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어 어찌할 바 모르는 동생 역할을 맡게 됐다. “연기 욕심은 많은데 잘 안돼서 힘들었던 영화였어요. 그래도 조승우 형의 연기를 보면서 나도 저런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습니다.” 배우로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던 시기의 방황과 좌절은 이번에 영화를 찍으면서 ‘아픔을 겪으며 껍질을 벗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견자의 성장통을 이해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오디션에서 장근석, 이준기에게 밀렸지만 한번은 온다는 기회 잡으려 기다렸어요”
배우 황정민과는 드라마 <그저 바라보다가>에서 김아중의 동생으로 출연한 후 영화 <구르믈...>로 두 번째 인연이다. 그는 두 작품 연달아 황정민과 함께 한 것을 두고 “인복이 많다”고 말했다. “이번 영화에서 황정민, 차승원 두 선배님들로부터 연기의 테크닉 뿐 아니라 배우를 직업으로 사는 인생은 어떤 것이고 작품에 임하는 마음은 무엇인지, 삶의 자세를 배운 것 같습니다.” 영화 속 견자에 대해 그는 “젊은 남자 배우라면 누구나 욕심낼만한 역”이라면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유롭게 비상하고 싶다는 열망과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절망이 교차하는 과정을 연기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준익 감독은 <왕의 남자>, <즐거운 인생>의 오디션에서 그를 탈락시켰지만 언젠가 써먹을 인재로 백성현을 기억해뒀다는 후문이다.
“<왕의 남자> 공길이 오디션을 봤을 때 저는 고등학생이었어요. 동성애 코드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에 최종 4명까지 올라간 것도 저로서는 대단한 일이었죠. 그 역은 제게 맞는 옷이 아니었어요.” <즐거운 인생>에서는 장근석에게 밀렸지만 돌이켜보면 노래를 잘 하지 못하는 그에게 맞는 역할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전 장근석처럼 끼가 많지 않고 이준기처럼 눈길 끄는 멋진 외모도 아니지요. 하지만 열정을 놓지 않고 기다리다 보면 누구에게나 한 번은 찾아온다는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백성현을 누구의 동생, 누구의 아역이 아닌 그 자신의 이름으로 빛나게 하는 스타의 대열에 오르게 할까. 그 답은 이제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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