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훈(44)이 깡말라 보였던 적이 있었나. 그의 이름을 들을 때 얼핏 떠오르는 것은 둥글둥글한 얼굴에 가득 담긴 기분 좋은 미소다. 하지만 20일 개봉하는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15세 이상 관람가)에서 박중훈의 환한 웃음을 볼 수 있는 건 딱 두 번뿐이다. 그 두 번의 웃음만으로도 이 영화는 극장을 찾아가서 볼 가치가 충분하다. 영화 속의 그를 따라 웃게 되는 까닭이 전보다 조금 더 복잡 미묘해졌기 때문이다. 두목이 지은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혔다 나온 순박하고 무능한 깡패 동철(박중훈)은 상영시간 105분 내내 잔뜩 웅크린 어깨 위로 오만상을 찌푸린 채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투덜거린다. 배우 박중훈을 전혀 모르는 이가 아니라면, 동철의 까칠한 얼굴과 이 대사 위에 2009년 박중훈이 겪었던 진퇴양난을 슬며시 오버랩 시켜볼 수밖에 없다. 8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캐릭터 설정에 맞춰서 감량을 한 건가.
"굳이 살을 빼야 하는 역할은 아니었다. 그냥 20여 년간 40여 편의 영화를 하다 보니 관객에게 내 모습이 너무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덜 익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네 가지 변화를 줬다. 머리 짧게 자르고, 수염 기르고, 얼굴 태우고, 체중 줄이고…. 나름 노력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새로운 모습이라고 생각해주지는 않는 것 같다."(웃음)
-'감옥에 오래 있다 나와서 앙상해진 깡패'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모습에서 '2009년 박중훈의 개인적인 마음고생'이 보이더라. 듣기 거북하고 지겨울 얘기부터 먼저 짚고 가자.
"괜찮다. 같은 질문이라도 누구한테 답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얘기가 된다." -지난해 '해운대'에서 맡은 지질학자 역할로 인해 연기력 논란이 적잖았다. '해운대의 옥에 티'라는 말까지 나왔다. 많은 것을 걸고 시작했을 TV 토크 쇼 프로그램도 시청률 부진으로 4개월을 못 채운 채 막을 내렸다. 의기소침하지 않았나.
"더 심한 혹평도 들어봤다.(웃음) 비유하자면 그 영화에서 나는 월드컵 우승국의 페널티킥 실축한 선수였다. 하지만 '티의 옥'보다는 낫지 않나. 연기보다는 무기력한 역할 탓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와 맞지 않는 역할 때문에 불거진 연기력 논란…. 동요하지 말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토크 쇼는 시청률에서 실패했지만 획일화된 기존 토크 쇼와 차별화된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 시도로서 의미가 있었다."
-'맞지 않는 역할'인 걸 모르고 출연했나.
"조연이지만 '될 성싶은 영화'에 올라타자는 심리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맞지 않는다는 건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느꼈다는 게 아니라 관객에게 낯선 모습이었다는 말이다. 진지한 인텔리인 지질학 박사…. 나에게는 분명 내 모습 중 일부인데, 관객에게는 낯설었던 거다. 자꾸 껄끄럽게 도드라지니 '티'로까지 여겨진 거겠지."(웃음)
-출연을 후회하지 않나.
"1000만 관객을 동원한 '해운대'가 내 인생과 엮여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 어느 쪽이 나은가?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다."
-연기에 대한 비판이 처음 나왔을 때도 지금처럼 의연하게 대응했나.
"인지상정 평가가 나쁘면 흔들리기도 하고 기분 상할 수밖에 없지. 처음부터 어떻게 다 초월한 듯 반응하겠나. 흔들림의 강도와 길이가 문제다. 이제 어느 정도 그런 상황을 잘 조절할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은 것 같다. 배우들이 잘 빠지는 착각의 함정이 있다. 길을 걸어갈 때 정말 좋아서 반갑게 나를 바라보는 팬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은 '어, 박중훈이다' 잠깐 본 다음 그냥 자기 갈 길 간다. 그런데 그 짧은 찰나들을 이어붙이고 '세상이 다 나만 바라본다'는 착각을 하기 쉽다. 나쁜 평가도 마찬가지다. '연기 좀 어색하던데?' '안 어울리더라.' 다 그냥 툭툭 던지는 말이다. 그걸 뭉뚱그려서 '세상이 다 내 연기를 나쁘게 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 일이 생기면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바라보고 자기 성찰을 하면 된다. '아 어떡하나' 낙담할 필요가 없는 거다."
-힘들다고 술을 많이 먹거나 하지도 않았나.
"술을 왜 먹나. 안 그래도 충분히 괴로운데.(웃음) 2001년 '세이 예스'라는 영화 찍었을 때도 정말 혹평을 많이 들었다. 그래도 지내놓고 나면 다 피와 살이 되더라. '해운대' 덕분에 다음에 박사 역을 맡으면 관객이 훨씬 더 잘 받아들여줄 거다. 역할 확장의 신고식을 홍역처럼 치렀다고 생각한다. 그림자가 있으면 반드시 어딘가 빛이 있다. 그림자만 보고 앉아서 좌절하지 말고 어떻게든 빛을 찾아내야 한다. '내 깡패 같은 애인'도 지금 그럭저럭 평가가 좋게 나오고 있는 편이지만, 그림자도 반드시 있을 거다." -'익숙한 코미디 장르, 익숙한 깡패 역을 해야 잘 되는 배우'라는 비판이 그림자가 될 수 있겠다.
"이걸 하면 이게 걱정, 저걸 하면 저게 걱정이라면 아무 것도 못 하게 된다."
-'해운대'와 '내 깡패 같은 애인' 중 어느 쪽이 더 작업하기 편했나.
"단순한 대답부터 하자면 당연히 후자다. 이유가 중요하다. 박사냐 깡패냐의 문제가 아니다. 주연이냐 조연이냐가 컸다. 주연이 훨씬 편하다. 캐릭터의 사연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의 공감을 얻기 용이하다. 조연은 그 과정을 생략하기 때문에 설득력을 얻기가 훨씬 어렵다. 또 한 가지. 미국 할리우드 농담 중에 '연기 정말 못하는 배우는 형사 역을 줘도 잘 못한다'는 게 있다. 형사나 건달은 연기 패턴이 동적(動的)이고 성격이 분명하다. 역할이 어느 정도 연기를 해 주는 셈이다. 깡패 역은 못하기도 어렵지만 특출하게 잘 하기도 어렵다. 박사는 정반대다. 뭘 보여주겠나. 실험복?"
-무슨 말인지 이해는 되는데 납득은 잘 안 된다. 듣던 대로 달변인 건 틀림없는 것 같다.
"아니 왜 인터뷰를 대결 구도로 몰아가려 하나."(웃음)
-토크 쇼 진행하면서 그런 긴장감을 충분히 느꼈을 텐데…. 말 하려 하지 않는 이로부터 말을 뽑아내야 하는 사람의 심정.
"교만하다고 욕하지 말고 들어 달라. 나는 말을 잘 하는 편이다. 작정하고 달려들어서 물고 할퀴면 누구든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하다. 그런데 내 토크 쇼라고 날 보고 믿고 온 동료들을 먹이 다루듯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약해서. 요리를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지.(웃음) 그게 내 한계였다. 다른 스태프가 나와 친분이 없는 사람을 섭외해 오는 시스템이었다면 좀 달랐을 거다. 정치인들 나왔을 때 참 편안하고 쉬웠다. 그들은 할큄을 당해야 할 책무가 있는 사람들이니까. 또 아무리 할퀴어도 워낙 익숙해서 그런지 흠집이 잘 안 나더라."
-장편 데뷔하는 김광식 감독의 영화인데 어떻게 알고 출연하게 됐나.
"'해운대' 상영이 마무리될 즈음 윤제균 감독이 '팔딱팔딱 물고기처럼 뛰는 캐릭터를 하는 게 좋겠다'며 자기 회사가 갖고 있던 시나리오를 건네줬다. 기초와 구조공사는 잘 마쳤는데 마감과 인테리어가 덜 된 건물 같은 느낌이었다."
-각본 수정에 의견을 많이 냈나.
"많이 냈다. 촬영 전 김광식 감독과 정말 긴 시간을 같이 보냈다. 처음에 동철은 허접한 삼류 루저(loser) 깡패가 아니라 나름 힘 좀 쓰는 깡패였다. 내가 제안해서 수정했다. 사실적인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드문드문 유머를 삽입한 것도 그렇고."
-주인공을 왜 루저로 만들었나.
"뭐든 잘 안 되는 캐릭터여야 관객의 호응을 더 얻을 거라 생각했다. 솔직히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영화를 빼면 하자가 있거나 주변인이어야 주인공이 된다."
-계속 본인에 대한 질문을 일반론으로 몰아가는 듯하다. 곤경에 처한 본인의 상황을 영화에 어느 정도는 반영한 것 아닌가.
"어렸을 때부터 나는 별 부족함이 없이 살아왔다. 가정이든 일이든. 그런데 한 번도 가지지 못했던 게 있다. 동정표다. 동정표 없이 살아가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누가 그러더라. 정말 돈이 없을 때였는데, '그래도 왠지 박중훈한테는 어딘가에 건물 하나 숨겨놓은 게 있을 거 같다'고. 그런 이미지가 성공의 원동력도 됐지만 힘들 때는 정말 사람 외롭게 만든다. 그런데 지난해 두 번 크게 흔들리는 와중에 동정표를 경험했다. '어 저 사람, 저 선배 …. 잘 돼야 하는데….' '옛날에는 최고였는데….' 라는 둥."
-'요즘 애들은 박중훈 몰라' 하는 얘기도 들렸다.
"그래, 바로 그런 거.(웃음) 동정표 얻어 보니 좋더라. 우리 집이 남자들만 있는 집안인데 가훈이 '행동은 정정당당하게'다. 자랄 때 이렇게 교육을 받고 나니 동정 받는 데 대한 본능적 거부감이 있다."
-영화에서 '힘이 들 때 그 사람이 곁에 있어줬다'는 말이 주제어처럼 나온다. 개인적으로 힘들 때 누가 곁을 지켜 줬나.
"나는 시각이 시니컬하지는 않은데 시니컬한 현실을 마음속으로 인정하는 사람이다. 부모가 자식을 향하는 마음 빼고는 모든 관계는 협상 아닌가. '어떤 경우를 당해도 내 편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생각한다. 형제도 힘들다. 부모 빼고는. 가족 외의 관계는 내가 뭔가 가지고 있을 때 유지된다. 뭔가 주지 않고서 받을 수 있는 관계는 세상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의 현실 아닐까 싶다. 그걸 뛰어넘어서 따뜻한 마음을 발휘하면 정말 훌륭한 휴머니즘이 되는 거고."
-10억 2천만 원짜리 작은 영화다. '그래도 박중훈'인데. 자존심 상하지 않나.
"그렇지 않다. 전에 보통 주연할 때 받은 돈의 4분의 1 정도 받았다. 해운대 때는 50% 받았고. 조연이었으니까. 개런티가 적은 덕에 편안하게 작업했다. 비용이 적으니 '얼마 벌어야 한다'는 부담이 적다. 2000년대 들어서 주연한 영화가 9개인데 '라디오 스타'랑 '황산벌'만 흥행이 잘 됐다. 전만큼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게 합리적인 거다. 자존심 문제는 이렇다. 내가 이렇게 끝날 거 같으면 오히려 어떻게든 돈을 더 챙기려고 난리법석을 부리겠지. 배우의 자존심은 출연료가 아니라 연기력, 그리고 영화의 성패에 달려 있는 거다."
-박중훈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민감한 질문이다. 나는 전성기가 오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연기를 한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다. 누군가 나에게 이야기한 내 전성기를 인정해버리면, 나는 앞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그때만큼 못한 사람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면 내게는 배우로서의 미래가 없어지는 거다. 나는 내게 나 자신도 모르는 미래가 있다고, 지금 잠깐 웅크려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개런티가 4분의 1이 됐다지만, 이미 충분히 고액이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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