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 누가 있겠는가. 11일 밤 늦은 시각에 미진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전화 수화기 너머로 들려주는 박중훈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성실한 답변으로 응했고 이는 각별한 영화 사랑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그만큼 그의 전제는 당연해 보였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에 두고 박중훈은 살 같고 피 같은 자신의 작품 40편 속 캐릭터 가운데 다섯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생각을 다듬어 답해주었다.
① “청바지와 청재킷이 잘 어울리던 청춘스타”…철수(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1987년)
20대 초반, 청바지와 청재킷이 잘 어울리던 시절에 찍은 영화였다. 두 남녀 대학생이 벌이는 로맨스와 청춘의 발랄하고 맑은 감성이 많은 관객을 불러모았다. 이규형 감독 연출로 강수연과 함께한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나를 처음으로 인기배우의 반열에 올려주었다. 그런 첫 기쁨을 안으면서 인기를 실감하게 했고 나는 청춘스타가 됐다. ② “가장 가슴을 아프게 한 캐릭터”…용대(게임의 법칙, 1994년)
인생의 ‘영웅’이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청춘 용대가 조직과 보스에 배신당하며 끝내 허망한 꿈으로 스러진 영화. 아마도 내 영화 가운데 이처럼 관객의 가슴을 울린 캐릭터가 있을까 싶다. 여전히 많은 관객들의 가슴에 스며든 캐릭터라고 자부한다. 그만큼 관객에게 사랑받은 캐릭터이기도 하다.
③ “내가 그였고, 그가 곧 나였다”…우 형사(인정사정 볼 것 없다, 1999년)
살인범을 쫓는 강력반 형사들의 피곤한 추격전 속에서 가장 거친 캐릭터로서 각인된 작품. 이명세 감독의 스타일리시한 연출과 안성기, 장동건 등 내로라 하는 배우들과 함께 한 호흡으로 찬사를 받았다. 내 코믹 이미지에 지쳤던 관객에게 다가가며 절치부심해 만들어낸 캐릭터다. 촬영 등 7∼8개월 동안 우 형사가 되어 살았다. 그 캐릭터에 흠뻑 젖어 정말 그 사람이 되어 한동안 살았다.
④ “내겐 영광이었다”…계백(황산벌, 2003년)
나당 연합군에 맞서 최후의 일전을 벌인 백제 계백의 황산벌 전투를 코믹한 분위기 속에서 장렬하게 그린 영화. 계백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충장일 터이다. 전쟁의 역사는 늘 승자의 시선으로 그려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패자인 계백에 관한 역사적 자료 역시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야사 속 희미한 자료를 참조하며 연기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전장에 나서는 장수들과 달리 그는 가족을 죽이고 전쟁터로 달려갔다. 내겐 영광스런 캐릭터다.
⑤ “연민을 갖게 하는, 따스한 인간”…동철(내 깡패 같은 애인, 2010년)
반지하 방 이웃으로 만난 취업준비생 여자와 벌이는 좌충우돌 해프닝. 어떤 때에는 이 여자가 나보다 더 ‘깡패’ 같다. 하지만 그녀가 세상과 맞부딪쳐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 또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데 그건 동철의 가슴이 그만큼 따스한 덕분일 것이다. 오랜만에 삼류 깡패의 역할과 이미지를 내보이게 됐다. 건달의 냄새 물씬하지만 가슴만은 따스한 인물이다. 가히 연민을 느끼게 하는 인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