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안현진]미국판 김수현표 드라마 ‘페어런트후드’

주말 가족 모임. 3대가 마당에 놓인 큰 식탁에 모두 둘러 앉았다.

나는 종종 TV시리즈가 사람들에게 판타지를 주입한다고 생각한다. 선남선녀가 만나 멋진 집에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판타지, 번듯한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연애, 결혼, 육아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판타지가 그렇다. 이른바 '리얼리티'의 문제인데, 현실에 존재한다고 해도 내 것이 아닌 장면들이 유혹적으로 손에 잡힐 듯이 그려진다. 성공이나 행복에 대한 판타지가 전부가 아니다. 좌절과 실패가 혹독하면 혹독할수록 그 역시 판타지에 가까워진다. 저 정도는 힘들어야 성공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TV 속 세상에는 그렇게 중간이라는 것이 없다. 무엇이든 부풀려지고 포장된다.

▶보편적인 일상, 소소한 행복을 제시하는 가족 판타지 드라마

이번에 소개하려는 NBC의 가족드라마 '페어런트후드'(Parenthood)도 사실 그런 점에서는 판타지 주입의 의혹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게 어떤 판타지냐면, 중산층 가정에, 호감형 외모의 부모와 자식들, 또 그들의 자식들이 주인공인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가족과 그 행복에 대한 판타지'다. 사실 한국의 TV시청자들에게는 화목하고 단란한 3대를 그린 가족드라마는 오랫동안 주말 저녁을 책임져 왔기에 생소할 게 하나도 없다. '페어런트후드'는 '목욕탕집 남자들' '딸부잣집' '엄마가 뿔났다' 등의 한국 드라마가 다뤄왔던 확대가족을 내세워 '희로애락'이라는 인간사의 보편적 감정과 경험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페어런트후드'의 중심에는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백발의 할아버지와, 그를 오랜 시간 보살펴 온 (예쁜) 할머니,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4남매와 그들의 자식들이 있다. 공들여 세어보니 이 가족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필요한 밥그릇 수는 13개다. 지크 브레이버맨과 카밀 브레이버맨이 이 씨족사회의 족장과 부인이고, 그 사이에서 아담, 사라, 크로스비, 줄리아, 4남매가 태어나 잘 자랐다. 게다가 모두 근거리에 살아서 주말이면 널찍한 마당에나 놓일 것 같은 널찍한 식탁에 손수 준비한 음식을 차려놓고 모두 모여 앉아 촛불을 밝힌다. 식사 전 아버지들과 아들들이 모여 농구공을 튀기는 공익 광고에서나 쓰일 법한 장면이 늘 보여지고, 식사 후 어머니들과 딸들은 와인잔을 들고 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하지만, "아, 이 얼마나 가공된 이미지인가"를 말하기 이전에 '페어런트후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등장인물이 많은만큼 프로모션용 포스터도 다양하다. '페어런트후드' 포스터들.

▶털어보니 모두가 먼지투성이인, 너무나 인간적인 브레이버맨 가족

태양계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브레이버맨 가족이라는 소우주는 아담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부모도, 형제도 고민거리가 생기면 가장 먼저 아담을 찾는다. 장남이자, 가장인 아담(피터 크라우스)은 그 아버지인 지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치는 사람'이다. 물건이 고장 난 것도 잘 고치지만, 틀어진 가족 관계를 모나지 않게 둥글리는 데 재주가 있는 사람이란 이야기다. 다정한 한마디보다 엄한 얼굴이 먼저 나오는 아버지였던 지크가 자기와는 닮지 않은 아들이 장한 마음에서 한 이야기지만, 오히려 아담은 거울 속에서 닮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며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한데 드라마를 보다 보면 가끔 걱정이 된다. 가족들이 아담은 손을 뻗으면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처럼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아빠가 뿔났다'며 돌변하는 건 아닌지, 혹은 스트레스가 극심해서 과로사하는 건 아닌지 괜히 걱정이 든다.

모든 가족 구성원이 백조가 될 수는 없다. 어디에나 '미운 오리 새끼'는 있게 마련. 영어로는 '까만양(Black Sheep)'이라고 하는 이 못난이 구성원이 둘째 사라다. 사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밴드를 하는 남자친구와 결혼을 해 집을 떠났는데, 덕분에 마흔도 되기 전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를 가진 엄마가 됐다. '페어런트후드'의 이야기는 사라가 드류와 앰버를 데리고 프레즈노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대학교를 가지 않은 덕분에 예쁘지만 자신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싱글맘이 할 수 있는 일은 바에서 서빙하는 게 최선인데, 더 좋은 환경을 주려고 했던 자신의 계획과는 다르게 갑자기 커진 가족의 범위는 사라의 가족을 이리저리로 휘두른다. 휘둘리며 몸과 마음이 부딪혀 상처가 날 때마다 사라는 "괜히 돌아왔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사라만 미운 오리 새끼냐, 그건 또 아니다. 이 브레이버맨 대가족을 구성하는 핵가족 하나하나 모두에 털어놓기 힘든 문제가 있다. 우선 아담의 아들 맥스는 다루기 까다로운 아이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아스퍼거 신드롬(자폐증의 일종)을 앓는 아이였고, 차남 크로스비는 5년 전 짧게 데이트를 마친 댄서 재스민이 자신의 아이를 낳고 말도 없이 길렀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 마침 크로스비에게는 "아기를 갖자"고 저돌적으로 들이대는 여자친구 케이트가 있었는데, 그 바람에 케이트와도 순식간에 정리된다. 기업 인수 합병 전문 변호사로 승승장구하는 줄리아에게도 고민은 있다. 영재인 딸 시드니가 엄마의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것도 힘든데, 전업 주부인 남편 조엘은 시드니의 친구의 엄마가 노골적으로 친근감을 표시하는 데도 별말 없이 싱글거려 속을 썩인다. 게다가 아버지 지크는 자산관리를 잘못해서 파산 직전이고, 어머니 카밀은 그 동안 잃은 인생을 찾겠다며 새 출발을 노래한다.

▶완벽한 캐스팅, 너무 그럴듯한 가족의 이야기

처음 '페어런트후드'를 보게 된 이유는 아담과 사라를 연기하는 피터 크라우스와 로렌 그레이엄이라는 캐스팅 때문이었다. 피터 크라우스는 '식스 핏 언더'라는 가족 드라마에서 맏형 역할을 해냈던 전력이 있고, '길모어 걸스'를 보지는 않았지만, 로렌 그레이엄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페어런트후드'는 그 둘 뿐만 아니라 모든 캐스팅에서 우월했다. 배우들이니까 잘생기고 예쁘고 늘씬하고, 고등학생들조차 얼굴에 여드름 하나 없이 반반하다는 거만 빼면 이 브레이버맨 가족의 캐스팅은 완벽하다. "복덕방 김씨네 둘째 아들의 셋째 딸"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묘사가 있었더라도 만족시킬 그런 캐스팅이다. 물론 이 드라마가 전체적으로 그렇듯이 캐스팅조차 너무 짜맞춘 거처럼 완벽해서 조금 거부감도 든다.

게다가 어느 정도는 김수현식 가족 드라마를 환기시키는 구석이 있다. 3대를 늘어놓은 확대가족이 등장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따발총 같은 대사가 그렇다. 모두들 말이 너무 많은 가족이라서 한번 언쟁이 시작되면 모두다 한마디씩 하지 않고는 배겨나질 못한다. 어른들 말씀하실 때 잠자코 듣기 위해 순종했다기보다는, 그냥 한마디라도 했다가는 돌아올 후환이 두려워 침묵했던 나와는 너무 다르다. 다들 한마디씩 하지 않고는 그냥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는 가족들이다. 그래서 '페어런트후드'에는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채 모두가 뭐라고 자기 입장을 설명하고 있는, 엄청난 소음 상태의 장면이 종종 재연된다. 마치 '이 정도는 시끄러워야 진정한 가족 아닙니까'라는 듯한 장면. 그리고 그 소음을 잠재우는 역할은 역시 장남인 아담에게로 돌아간다.

▶그래도, 가족이라서 다행이야

그런데, 이렇게 쓰다보니 괜찮은 드라마를 너무 깎아내리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불편하다.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기에 설명하려고 하면 힘든 게 사실 아닌가. 소소한 일상에서 발견한 특별한 무엇이 없다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일상이고, 보편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완벽하게 일상을 재연했기에 너무나도 드라마스러운 리얼리티를 제외하면 '페어런트후드'가 마땅히 받아야하는 감점은 없을 것 같다. 어쩌면 TV에서는 그냥 판타지스러운 판타지를 보고 싶은데, 내가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은 판타지를 보여주는 바람에 '잘 만든 드라마'를 이렇게 살짝 비뚜름하게 바라본 건 아닌가도 싶다.

마지막에 와서 말하는 게 좀 웃기지만, 나는 이 드라마를 좋아한다. 캐릭터도, 이야기도 모두 좋지만(사랑스럽지는 않다), 사실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바로 오프닝이다. 드라마에 쓰인 거의 모든 음악이 포크송이지만, 오프닝에서 밥 딜런의 'Forever Young'이 흘러나오면 출연자들의 어린 시절 사진과 드라마 속 모습들이 겹쳐 지나간다. 그때 나는 잘 꾸며진 한 권의 가족 앨범을 보는 기분이 든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의 행복한 기억들이 담긴 오래된 사진첩 말이다. 그 사진 속의 사람들은 행복하고 화사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든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웃는 얼굴을 보인다. 그래서 '페어런트후드'의 오프닝을 보고 있으면, 이 사진첩처럼 좋은 것만 기억하고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조차도 판타지일지 모르지만, 그런 행복한 기억들이 살아갈 힘이 되어준다는 것도 아마 사실이 아닐까.

안현진/잡식성 미드 마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