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렌치로 심장을 쑤신다. ‘푹’ 살이 파이는 소리, ‘꿀쩍’ 피가 뿜는 소리, ‘우욱’ 하는 목멘 비명이 동시에 귓전을 때린다. 24일 개봉하는 할리우드 공포영화 ‘여대생 기숙사’(18세 이상 관람가) 도입부의 한 장면이다. 짓궂은 장난을 치다가 친구를 죽게 만든 여대생 5명이 1년 뒤 차례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는 줄거리. 10여 년 전 만들어진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와 ‘스크림’을 뒤섞은 듯한 내용이다.》
이야기가 참신하지 않은 탓인지 영화는 뒤로 갈수록 등장인물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자극적인 장면에만 의존한다. 머리가 잘리고 다리뼈가 드러난다. 목에 꽂았던 칼을 ‘서걱’ 빼내는 소리, 입에 술병이 꽂힌 채 질식해 죽어가는 사람의 핏발 선 눈동자가 세세히 묘사된다.
이 영화, 그래서 무서울까. 눈뜨고 보기 힘든 신체훼손 장면이 쉴 새 없이 반복되지만 9일 열린 시사회 객석 분위기는 덤덤했다. 서진호 다음 콘텐츠본부 차장은 “잔혹한 장면의 물량공세로 ‘이래도 안 무섭냐’는 듯 관객을 몰아붙이려 하는데 어디서 무서워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말했다.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모습과 소리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한데 왜 공포감은 크지 않을까. 심리학자들은 “표현기술의 함정에 빠진 공포영화가 ‘혐오 영화’만 양산한 까닭”이라고 말한다.
더 끔찍하고 잔인한 장면을 보여줄수록 관객이 얻는 감정과 자극도 커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공포는 불안감을 갖게 하는 원인의 정체가 모호할수록 더 강하게 유발된다. 신체 훼손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잔혹한 장면이 불쾌감은 줄 수 있어도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어려운 이유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끔찍한 장면의 디테일한 표현에 치중한 공포영화는 ‘더 자세히 보여줄 수 있다’는 기술의 유혹에 붙들려 관객의 마음을 놓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여대생 기숙사 - 나이트메어 등 표현기술에만 의존 ‘이야기’ 부족 메시지 증발 말초적 자극에 치중 잔
인한 장면 반복땐 모방 우려도
‘신체강탈자의 침입’ ‘악마의 씨’ ‘오멘’ 등 공포영화의 고전에서 끔찍한 장면이 두드러진 경우는 드물다. 1970년대 미국 개봉영화 흥행 3위에 오를 정도로 화제를 모은 ‘엑소시스트’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심령공포영화다. 악령이 깃든 소녀가 머리를 360도 회전하는 장면이나 몸을 뒤집어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면이 화제가 됐지만 과장된 잔혹함은 없었다. 이 영화가 지금까지 걸작으로 꼽히는 것은 악령이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지 않은지 주변을 돌아보게 만드는 서늘한 사실감 때문이다.
잔혹한 영화로부터 관객이 받는 영향은 어떨까. 카타르시스(감정 표출로 인한 마음의 정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잔인한 장면에 대한 반복적 경험이 경계심을 둔화시켜 현실에서의 모방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가 더 크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같은 좀비 영화, ‘할로윈’ ‘텍사스 전기톱 학살’ 같은 슬래셔 영화가 최근 리메이크되면서 스토리에 대한 창의적 재해석 없이 살육 장면의 상세한 묘사에만 공들인 인상을 주는 것은 그런 면에서 걱정할 만한 현상이다.
공포영화의 이야기에서 사회적 메시지가 증발한 까닭에 말초적 자극에 치중하게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심리학자 겸 영화평론가인 심영섭 씨는 “198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공포영화는 세대 간 갈등, 소수자에 대한 억압 등을 은유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고 말했다. 요즘 공포영화가 독창적인 괴물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13일의 금요일’ 등 옛 인기 시리즈의 리메이크에 매달리는 것은 영화가 사회현상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역할을 잃고 단순한 오락거리가 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난달 국내 개봉한 ‘나이트메어’ 리메이크 판에서 주인공 ‘프레디’가 다면적 성격을 잃고 단순한 살인마로 그려진 까닭도 같은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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