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열어요. 꿈속까지 송두리째. 당신이 진정 어떤 사람인지 내가 알 수 있도록.”
21일 개봉하는 ‘인셉션’(12세 이상 관람가) 도입부에 나오는 주인공 코브(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대사다. 1920년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앙드레 트리동이 프로이트의 ‘꿈의 심리학’ 머리말에 쓴 문장과 닮았다. “어떤 사람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그의 꿈이 보여주는 무의식을 들여다본 뒤에 가능하다.”
프로이트의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인셉션’을 즐기는 데는 지장이 없다. 꿈속에 침투해 생각을 조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대기업 후계자의 머리 속에 새로운 기억을 심어 달라는 의뢰를 받은 코브 등 침입자들은 ‘표적’의 꿈속에서 이에 저항하는 잠재의식과 격투를 벌인다. 이달 초 BBC와의 인터뷰에서 “007의 오랜 팬”이라고 밝힌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자동차 추격전, 설원 전투장면 등에 007 영화를 연상시키는 액션을 펼쳐놓았다. 디캐프리오와 조지프 고든 레빗 등 배우들의 호연, 2억 달러(약 2400억 원)를 들인 특수촬영 세트와 컴퓨터그래픽의 위용을 감상하며 블록버스터 공상과학(SF) 액션물로 가볍게 즐겨도 그만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는 만큼 더 보인다’. 놀런 감독은 10년 전 장편데뷔작 ‘메멘토’에서도 얼핏 단순해 보이는 액션스릴러 속에 ‘단기기억상실’을 앞세운 정교한 두뇌게임을 설치해 관객을 열광시켰다. 그가 ‘인셉션’ 시나리오 초고를 쓴 것은 25년 전. ‘다크 나이트’로 10억 달러를 벌어들이고 난 뒤 비로소 거액을 들여 찍을 수 있게 된 야심작이다. 아내와 함께 제작까지 맡은 놀런 감독은 곳곳에 신화, 수학, 미술, 종교, 정신의학, 문학에서 가져온 키워드를 숨겨뒀다. 찾고 안 찾고는 관객의 선택이다. 보이는 만큼 더 즐거워지는 것은 틀림없다.
○ 잠재의식 저항군(프로이트)
상영시간 147분간 등장하는 수많은 전투는 모두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생각을 조작하려는 침입자와 그것을 막으려는 잠재의식 간의 전쟁. 프로이트는 꿈을 꿀 때 일어나는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면서 ‘칸막이’ 역할을 하는 잠재의식의 저항에 대해 언급했다. 꿈을 “억압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라고 본 프로이트는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침투에 대한 잠재의식의 저항이 감각기관의 흥분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놀런 감독은 이 과정을 침입자와 저항군의 총격전으로 은유했다.
“꿈속의 1시간은 현실의 5분”이라 설정한 근거도 프로이트로부터 가져왔다. 프로이트는 짧은 수면시간에 꿈속에서 수많은 일을 겪은 것처럼 기억되는 현상을 ‘꿈의 압축작용’이라 설명했다. 단절된 내용이 중간과정 없이 기억에 남기 때문이라는 것. ‘인셉션’의 침입자들은 이 시간의 속도 차를 활용해 짤막한 꿈속에서 수많은 일을 해낸다.
○ 아리아드네의 미로(그리스 신화)
침입자 중 꿈속 공간의 설계를 맡은 프랑스 파리 건축대 학생의 이름은 아리아드네(엘런 페이지)다. 코브는 그의 능력을 시험하겠다며 “미로를 디자인해보라”고 시킨다. 아리아드네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온다. 미로 속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러 온 테세우스에게 실 뭉치를 건네줘 길을 잃지 않게 도운 크레타의 공주. 코브가 아리아드네에게 “잠재의식으로부터 쉽게 숨을 수 있도록 복잡한 미로를 설계해 달라”고 하는 것은 신화를 응용한 대사다.
○ 무한계단(수학과 미술)
코브의 동료 아서(조지프 고든 레빗)는 아리아드네에게 꿈속 공간을 안내하며 무한히 맞물려 올라가는 ‘펜로즈의 무한계단’을 걷게 한다. 영국의 수학자이며 이론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즈는 1958년 심리학 저널에 기고한 ‘불가능한 대상: 시각적 착시의 특수한 형태’를 통해 3차원 공간에서는 만들 수 없지만 2차원 평면에 오류 없이 그릴 수 있는 도형과 계단을 제안했다. 네덜란드 판화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위스 에스허르도 ‘상대성’(1953년) ‘올라가고 내려가고’(1960년) 등의 작품에서 무한계단을 소재로 썼다. 아서는 영화 후반 이 계단을 활용해 적을 물리친다. 아리아드네는 도시의 지면을 180도 뒤집어 무한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 ‘꿈속 꿈’과 림보(문학과 신학)
“신이여, 동정 없는 파도로부터 한 조각 꿈이라도 지켜낼 수 없을까요? 눈으로 보거나 또는 보고 있다 생각하는 것은 모두 ‘꿈속의 꿈’일 뿐인가요?”
미국 시인 에드거 앨런 포의 ‘꿈속 꿈(a dream within a dream)’ 마지막 연이다. ‘인셉션’에서 침입자들은 꿈속에서 다시 세 번 더 꿈을 꾼다. 영국 런던대에서 문학을 전공한 놀런 감독은 영화 말미 거센 파도에 흩어지는 꿈속 공간을 통해 포의 시를 형상화했다. 꿈속 꿈으로 무리하게 뛰어든 자가 영원히 갇히게 되는 무의식의 밑바닥 공간 ‘림보(limbo)’는 기독교에서 온 말이다. 천국, 지옥, 연옥 중 어디로도 가지 못한 망자의 영혼이 머무는 곳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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