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女力’이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8월 31일 03시 00분


여성 캐릭터, 현실성 없는 무기력한 피해자-그리움의 대상에 그쳐

"당신은 내 인생을 망쳤어! 죽을 때까지 사랑한대 놓고 헌신짝 버리듯 떠나다니!"

"재산의 반을 줄게. 괴롭겠지만…. 당신에게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 곧 나타날 거야."

어느 쪽이 남편이고 어느 쪽이 아내일까. 9월 30일 개봉하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도입부에서 울며불며 매달리는 파트너에게 재산을 뚝 잘라주며 점잖게 달래는 주인공은 아내 리즈(줄리아 로버츠)다.

자아를 찾겠다며 안정적 일상을 박차고 떠난 진취적 여성 리즈는 실제 현대사회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캐릭터다.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법조계 등 사회 곳곳에서 여성 인력의 우수성이 남성을 압도하고 있다. '내신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여학생이 남녀공학을 선호한다'는 뉴스도 이제 별로 놀랍지 않다.

하지만 2010년 한국영화 속 여성 캐릭터는 현실세계의 우먼파워를 담아내지 못하는 모습이다. 오히려 시대역행에 가깝다. 할리우드와 비교하면 영화 속 한국 여성상의 퇴행성은 더 뚜렷해진다.

●'수동적 배경'에 머문 한국 영화의 여성들

한국과 미국의 손꼽히는 스타 여배우가 연기한 배역은 두 나라 영화에 나타난 여성 캐릭터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관습의 굴레에 힘없이 희생당하는 전도연의 ‘하녀’(왼쪽)와 달리 앤젤리나 졸리의 ‘솔트’는 소속 집단의 압박에 강하게 저항한다. 사진 제공 미로비전 소니픽쳐스
한국과 미국의 손꼽히는 스타 여배우가 연기한 배역은 두 나라 영화에 나타난 여성 캐릭터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관습의 굴레에 힘없이 희생당하는 전도연의 ‘하녀’(왼쪽)와 달리 앤젤리나 졸리의 ‘솔트’는 소속 집단의 압박에 강하게 저항한다. 사진 제공 미로비전 소니픽쳐스
"안되겠지?"

"…. 돼요."

5월 선보인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여주인공 세진(정유미)이 옆집 깡패 동철(박중훈)에게 몸을 '허락'하는 장면이다. 위로주를 주고받다가 하룻밤 인연을 맺고 가까워지는 남녀. 낭만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영화 결말에서 세진의 캐릭터는 동철의 인생에 한줄기 희망의 빛을 뿌리는 구원의 여인상으로 정리된다. 6월 개봉한 '포화 속으로'는 어머니(김성령)와 간호사(박진희)의 이미지를 짤막하게 삽입하며 전쟁터 속 남자들이 환상처럼 붙드는 구원의 여인상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구원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여성은 대부분 무기력한 피해자다. 최근작 '악마를 보았다'와 '아저씨'에 등장한 여성은 남성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비참한 꼴을 당한다. 두 영화 속 여자들은 남성들의 현란한 싸움 장면들을 이어주는 접합제에 불과하다. '악마를…'은 세 차례의 성폭행 장면을 자세히 묘사해 여성들을 눈요깃거리로도 활용했다.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중 흥행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의형제'에도 여성의 역할은 없었다. 말 한마디 못하고 살해당한 전향간첩의 아내이거나 북녘에 두고 온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남성을 쥐락펴락하는 할리우드 여성 캐릭터

7월 개봉한 '솔트', 9월 16일 개봉하는 '레지던트 이블 4'는 여주인공 앤젤리나 졸리와 밀라 요보비치의 매력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젊은 여성 관객을 타깃으로 삼은 '이클립스'의 여주인공 벨라는 두 미남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삼각관계 게임을 즐긴다. 판타지 영화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원작과 달리 사악한 적에 맞서 칼을 들고 싸우는 박력 만점 앨리스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얼핏 남성 캐릭터를 보조하는 역할에 그치는 듯 보이는 여성도 실상은 거의 예외 없이 주체적 역량을 발휘한다. 캐머런 디아즈는 6월 개봉한 '나잇&데이'에서 첩보원 톰 크루즈의 매력에 정신없이 휘둘리는 평범한 여자처럼 등장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백미는 크루즈와 관객을 처음부터 '갖고 논' 디아즈의 정체가 밝혀지는 라스트 신이다. '아이언 맨 2'의 비서 페퍼 포츠(귀네스 팰트로)는 방탕한 주인공 대신 사장 자리를 맡아 전문기업인의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29일까지 관객 560만 명을 모은 화제작 '인셉션'에는 여성 건축가 아리아드네(엘런 페이지)가 있다. 격렬한 총격전을 펼치는 남성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들은 모두 아리아드네가 만든 꿈 속 세상에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배우 스스로 '틀'에 갇혀…미숙한 페미니즘도 한몫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에서 수동적 역할에 머물지 않고 독자적 판단과 행동을 보인 여성 캐릭터는 '방자전'의 춘향(조여정) 정도다. 몽룡과 방자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며 신분 상승의 꿈과 달콤한 연애의 환희를 동시에 추구하는 춘향은 '이클립스'의 벨라에 견줄만하다. 5월 열린 제63회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전도연의 '하녀'도 남성 중심적 사회에 소극적으로 반항하다 비참하게 파멸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렸다.

한국영화의 여성 캐릭터가 이렇게 나약해진 것은 흥행 가능성이 높은 액션과 스릴러 영화가 대세를 이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다. 하지만 여배우가 상업적 활동에 치중하며 이미지 변신의 여지를 스스로 없애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영화감독 K 씨는 "TV CF에서 '샤방샤방'한 이미지를 앞세우며 '여자라서 행복해요'라고 말하는 여배우만 넘쳐난다"며 "강한 여성 캐릭터가 주도하는 이야기를 구상하려 해도 그 역할을 맡길 만한 배우를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 내 TV CF에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는 할리우드 배우들과는 연기 스펙트럼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1960년대 생인 이정향 임순례 변영주 감독 이후 대중적 호소력을 가진 여성 감독의 계보가 끊긴 것도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학자들은 여성의 활발한 사회 진출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인식이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김정운 명지대 교수(문화심리학)는 "한국의 페미니즘은 아직 불안정한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다"며 "현실세계에서 갈수록 여성들에게 치이고 사는 남성 관객의 대리만족 심리가 영화에 작용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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