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MBC '선덕여왕'에서 왕이 되고 싶었던 미실 고현정(39). 그녀가 이번에는 방송국을 옮겨 대통령으로 변신한다. 고현정은 6일 첫 방송하는 SBS 정치 픽션극 '대물'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서혜림을 연기한다.
지략과 권모술수가 뛰어난 정치가 미실과 방송사 아나운서 출신인 서혜림은 천지 차이다. 방송사라는 든든한 직장도 있고 성실한 기자 남편과 어린 아들을 둔 단란한 가정의 주부 서혜림은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취재차 아프가니스탄에 갔다가 순직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후 그녀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뀐다. 억울한 심정에 자신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정부에 항의하다 방송사에서도 해고된 것.
그런 그녀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 있었으니 훗날 라이벌이 되는 국회의원 강태산(차인표·43)이다. 혜림은 보궐선거로 임기 1년의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남해도지사를 거쳐 대통령 후보에 오른다. 그리고 열혈 검사 하도야(권상우·34)의 도움으로 정계에 입문한 지 만 3년 만에 대통령에 당선된다.
고현정은 9월 29일 잠실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현실에서 유권자들이 정치권에 하지 못한 말을 대신 해서 답답한 속을 풀어드리겠다"고 자신했다.
참고로 '대물'이라는 제목은 '대(大)한민국 최초 여자 대통령 만들기(物)'라는 서혜림 대선캠프의 프로젝트 명을 줄인 것이다. '피아노', '스타일'을 연출한 오종록 PD와 '여인천하', '무인시대', '임꺽정'를 집필한 유동윤 작가가 손을 잡았고 현재 4회까지 촬영을 마쳤다.
▶'대물'이 성공하려면 '먹튀 비'를 막아라?
이날 언론 앞에 처음 '대물'을 공개한 SBS는 '권상우 사과'로 동시간대 경쟁작 KBS '도망자 플랜B'를 견제했다.
'도망자 플랜B'의 주인공 비(정지훈)는 최근 소속사의 최대주주였다가 전속 계약 만료를 앞둔 시점에 보유 주식을 전부 내다팔아 '먹튀' 논란에 휩싸였으나 9월 27일 드라마 제작발표회에 나와 한마디도 해명하지 않았다.
지난 6월 뺑소니 교통사고 이후 이날 처음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권상우는 "죄송하다, 죄송하다"며 연신 머리를 숙였다.
사회자는 "권상우 씨가 피하지 않고 말했다. 저희는 '비'가 내린다고 피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일부 방송 관계자는 권상우의 뒤에서 "잘했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박수치기도 했다.
제작진은 보도 자료에서 "'먹튀'가 아닌 '연습생' 출신 여성 정치가의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 대한민국의 희망을 이야기하다"라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표'를 먹고 튄 현실 속 불량 정치인을 꼬집는 말이지만, '먹튀 비'를 노린 것처럼 읽히기도 했다.
▶아무나 보면 먼저 '벌떡' 일어나 인사하는 고현정은 '벌떡녀'
'선덕여왕'에서 그렇게 원하던 권좌를 '대물'을 통해 차지한 고현정은 시종일관 싱글벙글했다. 그는 "혹시 미실처럼 제가 또 눈썹을 올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된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실제 정치권의 러브 콜을 수차례 거절했던 차인표는 "대물을 통해 국민을 섬기는 진정한 자세가 어떤 것인지 보여 드리겠다"고 했다. 권상우는 "좋은 연기로 마음을 보여드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현정 씨는 그 전 드라마에서는 연하와 많이 작업했는데 이번에는 유부남들만 나온다. '결혼하자'는 장난을 못 쳐서 아쉽겠다.
"저는 별로 안 가린다. 가능성은 항상 있다고 본다. 긴장하시라. 빈틈이 보이면 바로 공략한다. (웃음) 사실 아쉽긴 하다. 오늘 이 자리에 안 나오신 분들 중에 틈틈이 공략하는 분들이 많다. 즐겁게 촬영 중이다." (고현정)
-처음 연기하는 사이인데 서먹한 점은 없나.
"갑작스럽게 드라마로 만났기 때문에 어렵다. 하지만 서로 진짜 배려해 주는 걸 보면 마음이 풀리는 순간이 온다. 차인표 선배에게 인사로 '선배님 진짜 인기 많으셨죠?'라고 하니까 아니라는 대답을 안 하더라. (웃음) '별은 내 가슴에'에서 굉장히 멋있게 봤었다. 분장실에도 참 멋지게 하고 나온다. 조금 친해지면 제 스타일로 놀리면서 곁으로 다가설 것이다." (고현정)
"연기자 생활 17년 만에 여기 계신 세 분과 작업을 처음 해본다. 이수경 씨(유력 정치인의 사생아 장세진 역)는 팜므 파탈 역이지만 참 선한 사람이다. 권상우 씨는 진짜 '순둥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몇 신을 찍는 걸 보면서 내가 저 나이에 저렇게 열심히 했던가 싶기도 했다. 우리 고현정 대통령께는 내가 '벌떡녀'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항상 사람을 보면 먼저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인사를 한다. 고현정씨 같은 분이 인사를 먼저 하는 걸 보면서 전원이 인사성 밝은 팀이 됐다" (차인표)
-'픽션'이라고 해도 시청자는 현실 정치 속의 인물과 계속 연결하면서 볼 것이다.
"이 드라마가 재밌는 게 너무 직접적일 정도로 거리낌 없이 막 말을 해댄다. 여러분들의 속을 확 풀어 줄 것이다. 실제 정치가라면 이것저것 재면서 못할 말도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한다. 물론 현실과 잘 어우러지려고 조율을 하고 있다. 연기할 때는 사심이 없어야 한다. 또 다른 면에서 마음을 비우고 정말 이런 상황에서 이런 계층의 사람을 만나 어떻게 얘기를 할까를 고민하고 있다. 원 없이 소리를 질러보겠다." (고현정)
-차인표 씨는 실제 현실 정치권에서 권유를 받은 적이 있다. 정치인을 연기하는 기분은 어떤가.
"국회의원 지역이나 비례 대표 제안을 받았으나 고사했다. 그 이유는 정치는 '섬기는 자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그렇게 국민들을 사랑하면서 섬길 준비가 안 돼 있다고 생각했다. 국회의원이든 대통령이든 국민들이 표 세금 권력을 모아서 주는 이유는 우리 국민을 잘 섬겨 달라는 부탁의 의미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대물을 보면 섬기는 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차인표)
▶"연기가 쉽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정치나 연기나 대중의 감정을 이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연기하기가 오히려 쉽지 않았나?
"그렇다. 하지만 쉽다고 생각하는 순간 긴장을 덜 해서 배냇짓을 하게 된다. 내가 아는 게 다인 줄 알고 행동한다. 절대 그게 다가 아니니까 최선을 다해 연기하려고 노력 중이다. 혹시 제가 잘못 연기하면 지적을 많이 해 달라. 그럼 다시 긴장을 높여서 제대로 연기하겠다." (고현정)
-권상우 씨에게 질문. 원작 만화에서는 '제비'였던 하도야가 '검사'가 됐다. 연기하기는 어떤가?
"검사에 대해선 잘 모른다. 아는 척 할 수도 없고, 개인적으로는 원작 하도야(제비)를 더 잘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캐릭터가 변한 이상 자기가 정한 정의에 대해선 굽히지 않고 가는 괴짜 같은 하도야를 재밌게 그리겠다. 정치라는 게 굉장히 지루한 얘기인데, 다른 분들이 진지할 때 내가 코미디를 해서 분위기를 잘 조절하겠다." (권상우)
-전현직 대통령이나 정치인 중에서 모델로 삼은 사람이 있나?
"인터넷에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 영상이 있기에 몇 번 봤지만 강태산과는 맞지 않았다. 고민하던 차에 마침 드라마 촬영 시작 전에 국무총리를 비롯한 주요 장관들의 청문회가 있었다. 여러 국회의원이 산교육을 시켜주셔서 강태산을 연기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차인표)
"모델로 삼은 사람은 딱히 없다. 어느 나라더라, 여자 총리가 대정부 질문 받다가 못 참고 웃음을 터뜨리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런 모습이 서혜림의 모습인 것 같았다. 그런 자연스러운 모습을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현정)
-고현정은 청순하고 연약한 이미지에서 연예계 복귀 후 여장부 이미지로 굳어진 것 같다. 예전의 역할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나?
"지금 내 나이가 마흔인데 그게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 내 안에 연약한 면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 역할은 이미 실컷 해봤다. 지금 이 나이에 즐길 수 있는 캐릭터이지 않나 싶다. 언제까지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있기도 민폐이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효과적으로 일 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여장부 캐릭터가 되는 거 같다. 나도 여성스러울 땐 여성스럽다. 그저 일해야 할 때와 평상시를 구분 지으려는 거지. 일을 할 때 자꾸 '여자'라고 내세우는 사람은 나도 싫다. 내가 대장부 캐릭터에 빠져 사는 건 아니고 자연스럽게 맞는 캐릭터로 변해간 것이다." (고현정)
-권상우는 불미스러운 사건도 있어서 촬영장에서 마인드 컨트롤이 쉽지 않았을 텐데?
"가장 괴로운 것도 저이고 촬영 전부터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장에서 선배, 스태프와 마주칠 때마다 작품에 누가 될까 걱정스러웠다. '이 작품을 계속해야하나'라는 고민도 많이 했다. 하지만 현장의 선배님들도 마주칠 때마다 기운 낼 수 있도록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신다. 촬영을 계속하면서 자신감을 얻고 있다. 최대한 좋은 연기로 마음을 보여드리겠다. 너그럽게 지켜봐 달라."(권상우)
최현정 기자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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