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가 안 닮아서 실존인물 부담 욕망 넘치는 천재 베토벤에 초점 얄팍한 재주 믿고 무대서면 안돼
배우 박지일(50)은 인터뷰 내내 진지했다. ‘혹시 인터뷰에 불만이 있는 걸까’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며칠 뒤 제작사 관계자의 말을 듣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박지일이란 배우는 ‘기자와 소통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진지해진다는 얘기였다. 그가 “다 잊었다”라던 어려운 시절을 결국 토해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얼음 위의 불꽃’, ‘몸을 무대에 내던지는 배우’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박지일은 11월 28일까지 서울 동숭동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공연하는 연극 ‘33개의 변주곡’에서 주인공 베토벤 역을 맡았다.
루게릭 병에 걸린 음악학자 캐서린 브랜트(윤소정 분)가 인생의 마지막 투혼을 바쳐 베토벤이 남긴 33개의 변주곡 탄생의 비밀을 파헤친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게 참 부담스럽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켜야 하는 반면 베토벤의 이면도 보여줘야 하니까요. 일단 외형적으로 전혀 안 닮았잖아요.”
박지일은 베토벤에 대해 “스스로 보통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면서도 현세적 욕망이 굉장히 강했던 사람”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우리나라에서 ‘연극배우’로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박지일 역시 거칠고 투박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배우들이 다 그렇잖아요. 살점을 떼어내 피가 뚝뚝 떨어지도록 청춘을 바치지만 어떤 보상을 받을지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세월을 보내야 하죠.”
1992년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이사만 아홉 번을 했다. ‘집’을 옮긴 게 아니라 ‘방’을 옮기는 이사였다. 누우면 몸에 딱 맞았던 방. 라면박스를 놓아두면 꽉 차게 느껴지던 방. 박지일은 “마치 관에 누워있는 것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여름이면 꽁꽁 언 음료수 하나를 사서는 새벽 5시까지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버텼습니다. 새벽에 지쳐서 비몽사몽이 되면, 그제서야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잤어요.”
영화, 드라마, 뮤지컬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박지일은 “그래도 연극이 제일 재미있다”라고 말했다. 대학 시절 ‘에쿠우스’의 알런 역을 연기하다 맛 본 “이대로 죽어도 좋다”란 쾌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인터뷰 말미에 박지일은 “내 아들도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있다”라며 후배들에게 조언을 남겼다.
“돈도 안 되고, 이 힘든 일을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닌데 더 열심히, 미친 듯이 하고 나를 던져야 성취감이나마 생기지 않을까요. 얄팍한 재주, 재능만 믿고 섣불리 덤벼들어서는 안 됩니다. 내 살점을 무대를 위해 뚝뚝 떼어내 줘도 된다고 여겨질 때 하십시오. 아니면 인생이 불행해질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