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그때 이런 일이] 노래처럼 살다 노래처럼 떠나 김정호, 서른 셋의 삶 마침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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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29일 07시 00분


‘간다/간다/정든 님이 떠나간다/간다/간다/나를 두고 정든 님 떠나간다/님의 손목 꼭 붙들고/애원을 해도/님의 가슴 부여잡고/울어/울어도/뿌리치고 떠나가더라….’(김정호 노래 ‘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듯 피를 토해내며 부른 노래는 결국 ‘만가’(輓歌)가 됐다. ‘손목 꼭 붙들고 애원’하고 ‘가슴 부여잡고 울어 울어도 뿌리치고 떠나’간 사람.

1985년 오늘, 오후 1시 서울대병원에서 가수 김정호(사진)가 33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오랜 시간 그를 괴롭혀온 폐결핵을 이겨내지 못한 채 흰눈이 내리던 날, 경기도 파주시 기독교공원묘지에 영원히 잠들었다.

‘이름모를 소녀’와 ‘하얀 나비’, ‘작은새’, ‘님’,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 등 50여곡의 ‘불후의 명곡’을 남긴 김정호.

그는 서편제의 거목인 외할아버지 박동실과 국악인 어머니 박숙자 여사의 피를 이어받았다. 어머니는 자신이 걸어온 험난한 예술의 길을 물려주지 않으려 애썼지만 아들 김정호는 기어이 그 길에 나섰다.

그 길은 순탄치 않아서 가난과 배고픔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고 관계자들은 기록하고 있다. 1974년 임창제와 이수영으로 이뤄진 인기 듀오 어니언스가 부른 노래 ‘작은 새’는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당시 미8군에서 활동하던 김정호는 ‘작은 새’의 작곡가로 세상에 알려지며 이름을 얻었고 가수로 무대에 나서 ‘이름모를 소녀’를 선보였다.

‘이름모를 소녀’는 오랜 세월 자신을 지켜준 부인 이 모 씨를 짝사랑하며 품은 감성을 적은 노래. 영화로도 만들어져 주연을 맡은 정소녀를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김정호는 이후 ‘하얀 나비’와 ‘달맞이꽃’ 등 한국적 포크의 리듬과 멜로디에 애상 가득한 목소리로 외로움과 고독, 슬픔의 정서를 노래했다.

1976년 1월, 그는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음악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고 이후 몇 년 동안 무대에 설 수 없었다. 결핵균이 스멀스멀 그의 몸과 마음을 옥죄어가고 있던 때였다.

5년 뒤 MBC ‘토요일 토요일밤에’에 출연하며 재기하기도 했지만 이미 건강이 악화한 상태였다. 1985년 여름, 그는 마이크 앞에 다시 섰다. 그리고 5개월 동안 자신의 숨을 끊어놓으려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결핵균과 싸우며 마지막 앨범을 녹음했다. 여전히 꽹과리와 아쟁 등을 손에 쥐고 한국적 정서를 담아내는 음악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기도 했다. 여기 실린 ‘님’과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가 대중의 귀에 다가갔지만 이미 그는 세상에 없었다.

2년 뒤 김수희, 송창식, 전영록, 윤시내 등 18명의 가수는 ‘사랑의 앨범’을 고 김정호에게 바쳤다. 이 앨범은 ‘국내 최초의 헌정앨범’이 됐다.

그의 대표곡 ‘이름모를 소녀’는 1995년 MBC 라디오가 광복 50돌을 맞아 가요 관계자 10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우리 가요 100선’ 설문조사에서 25번째 노래로, 2008년 11월 KBS 1TV ‘7080 콘서트’가 1988명의 누리꾼에게 ‘7080세대가 뽑은 불후의 명곡’을 물어 10위에 각각 꼽혔다.

김정호가 세상을 떠난 1년 뒤 그의 동료들은 고인의 묘지에 ‘하얀 나비’ 노래비를 세웠다. ‘꽃잎은 시들어요/슬퍼하지 말아요/때가 되면 다시 필 걸/서러워 말아요’라는 ‘하얀 나비’의 노랫말처럼 김정호와 그의 노래는 영원히 팬들의 가슴에 피어나고 있음을, 앞서 적은 두 설문조사 결과는 말해준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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