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101번째 장편영화 ‘달빛 길어올리기’의 후반작업을 최근 마무리한 임권택 감독(75·사진)을 지난 주말 오후 서울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오래 묵은 손 떨림 증상은 여전했지만 동석한 지인들에게 소주를 권하는 목소리는 쾌활했다.
‘천년학’ 이후 4년 만에 내놓는 ‘달빛…’은 전통 문화재인 한지(韓紙)를 소재로 한 영화다. 박중훈이 한지 복원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공무원 역을, 강수연이 그 과정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PD 역을 맡았다. 전주시와 영화진흥위원회, 동서대로부터 제작투자 지원을 받아 2010년 초 촬영을 시작해 5월 말 완료했다. 그해 11월 개봉할 예정이었지만 3월 17일로 최근 개봉일을 확정했다.
크랭크업 후 영화계에는 한때 ‘임 감독 새 영화의 극장 개봉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한 소문이 돌았다. 소재, 캐스팅,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섞은 형식 등이 젊은 관객층의 구미를 당기기 어려운 요소로 여겨진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8월 CJ엔터테인먼트, 쇼박스미디어플렉스, 롯데엔터테인먼트 등 메이저 배급 3사 대표들이 이례적으로 의기투합해 공동 투자배급을 약속하면서 숨통이 트였다.
“지역의 고유 문화재 이야기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로 지자체가 나섰지만 진행이 수월하지 않았어요. 이제껏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진 적이 없었던 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완성해 내서 뿌듯하긴 해요. 힘은…, 들었죠.”
영화의 배경이 전주가 된 것은 종이를 많이 생산하는 고장이기 때문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史庫)에 보관돼 있던 실록만 무사히 옮겨져 역사의 맥을 이은 사연을 계기로 삼았다. 임 감독은 전주에서 사고 복원 작업에 관여한 교수들을 영화에 출연시켰다. 영화 제작이 마무리된 지금도 ‘한지에 대해서 들려줄 얘기가 있다’며 임 감독을 만나고 싶다는 요청이 간혹 온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임 감독이 한지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는 데 전문가들의 관심이 그만큼 남다른 것이다.
“지금은 존재조차 희미해졌지만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한지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생활자재였죠. 소중한 우리 것의 끊어진 자취를 다시 잇는 데 내 영화가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받아든 소주는 어쩐지 따뜻했다. 고3 시절 봄날 오후 ‘서편제’를 보려고 극장 앞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며 받았던 햇볕처럼. 영화 하나가 어떤 전통문화 장르의 붐을 일으키는 일이 임 감독 이후, 다시 벌어질 수 있을까. 개봉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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