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가장 눈여겨보는 작품은 ‘마이 프린세스’라는 TV 드라마다. 여기서 좌충우돌 여대생 ‘이설’로 나오는 김태희(31)만 보면 사랑스럽다 못해 잘근잘근 깨물어 없애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자기 얼굴만 한 스테이크를 포크로 푹 찍어 통째로 뜯어먹으며 “으음, 고기는 항상 옳아요. 구원 받는 느낌이랄까?”라고 할 때가 사랑스럽고, “음흐흐, 나 웃는 거 되게 예쁘죠?”라며 송승헌에게 들이댈 때가 사랑스럽고, 똥마려운 걸 참으며 냅킨을 입에 물고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순간(사진①)이 정녕 사랑스럽다. 물경 20여 년 전 영화 ‘귀여운 여인’(1990년)에서 줄리아 로버츠를 본 이후 내가 지금껏 목도한 가장 사랑스러운 여인은 이 드라마 속 김태희가 아닐까 한다.
사실, 그간 나는 이 칼럼을 통해 김태희의 ‘더러운’ 연기력을 수차례 비판하고 또 비판했다. 서울대 졸업이라는 학벌과 부모가 재산처럼 물려준 예쁜 얼굴을 제외한다면 그녀는 요즘 시쳇말로 ‘발연기 종결자’라고 불릴 만큼 2001년 연기자 데뷔 이래 민망한 연기력으로 일관해왔다. 여태껏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김태희의 모습이란 손을 좌우로 희한하게 휘저으며 까만 스타킹을 신고 오리처럼 뒤뚱뒤뚱 걷는 드라마 속 어색한 모습뿐이었다.
어쩌면 김태희는 연기자를 하기엔 너무나 순진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방송담당기자를 하던 2003년이었다. 당시 ‘스크린’이라는 TV 드라마의 제작발표회장에서 그녀는 압도적인 외모와 학벌로 기자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그녀를 둘러싼 기자 중 한 사람이 당시에 “남자친구 있어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없어요”라고 했다. 그때 내가 짓궂게 물었다. “정말 (남자친구) 없는 거 확실해요?” 그러자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짓을 한 사람이 참회할 때의 표정을 지으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어, 있…어…요. 근데 이거 말하면 안 된다고 기획사에서 그랬는데….”
다시 말해, 그녀는 그간 연기자로서의 능력이 모자랐다기보다는 자신의 준비에 비해 과대평가되면서 지나치게 크거나 중요한 배역을 맡아왔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머쥐는 기회는 약이 아니라 독이다. 그녀가 대작 드라마 ‘아이리스’(2009년)의 여주인공으로 전격 발탁되고 상대 배우 이병헌이 그녀의 입에 알사탕까지 넣어주었지만, 이 드라마 이후 김태희의 지명도는 오히려 떨어졌고 그녀가 등장하는 CF의 수는 줄었다.
심지어 지난해 그녀가 양동근과 짝이 되어 출연한 영화 ‘그랑프리’는 ‘말(馬)이 나오는 뮤직비디오’라는 혹평 속에 흥행에 참패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이병헌과의 ‘사탕키스’ 못잖은 창의적인 키스를 선보이는데, 비 오는 날 포장마차에서 양동근과 벌이는 우발적인 입맞춤(사진②)이 그것이다. 돌연 ‘후끈’해진 그녀는 양동근의 아랫입술을 물고 늘어지는데, 연출자의 의도와 달리 그녀는 쥐치포를 뜯어먹는 것처럼 따분하고 일상적인 표정이다.
그래서 내 주위의 많은 사람은 불과 몇 개월 만에 180도 다른 연기력을 보여주는 김태희를 두고 “이건 기적이 아닐까?” 한다. 연기를 못하던 배우가 갑자기 아주 잘하는 배우로 둔갑한다는 게 신의 은총이 아니라면 가능한 일일까 하고 말이다. 배우들이 연기력이 갑자기 좋아질 때는 난생처음 운명적인 사랑에 실제로 빠졌거나 아니면 그 캐릭터가 실제 자신의 모습과 우연처럼 100% 일치하는 두 가지 경우 중 하나라고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이런 놀라운 변신을 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김태희는 배우라는 직업에 운명을 걸겠다는 결심을 난생처음 했기 때문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김태희에게 ‘아이리스’는 장동건에게 있어 ‘친구’(2001년)라는 작품과 유사하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장동건이 ‘친구’를 거치면서 자신의 잘생긴 얼굴을 오히려 ‘장애’로 느끼고 이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나 ‘태풍’의 ‘센’ 연기를 통해 얼굴을 극복하려 했던 것처럼 김태희도 아이리스 이후 ‘똑똑하고 예쁜’ 자신을 오히려 뛰어넘으려 한다는 것이다. 아이리스가 끝나자마자 그 드라마를 연출한 양윤호 감독의 영화 ‘그랑프리’ 출연을 결심하고, 그것도 질척한 연기력으로 이름 난 양동근과 연인으로 출연하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자체로도 ‘이젠 배우로서 끝장을 보겠다’는 그녀의 내적 변화를 충분히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프린세스’ 속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생즉사 사즉생(生則死 死則生)’이란 금언이 절로 떠오른다. 그동안 살고자 했던 김태희는 죽었지만 이제 죽고자 하는 김태희는 화려하게 살아나고 있다. 예쁘고자 하지 않을수록 그녀는 더 예쁘다. 두 눈을 치켜 올리며 “그때 내가 회장님한테 눈을 이렇게이렇게 막 부라리면서 ‘용서 못한다’고 그랬잖아요!”라고 수다를 떠는 순간(사진③)의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생명체가 지구상에 있단 말인가.
나는 요즘의 그녀처럼 예쁘고 맹하고 편하고 사랑스러운 여성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이제 막 연기의 비등점을 넘어선 것 같다. 놀라운 그녀의 변신은 계속될까…. 나는 이제 서른 살을 막 넘긴 그녀가 부잣집 아들과 결혼하기보다는 미친 듯이 자신의 미래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갔으면 좋겠다. 좀 삐뚤빼뚤한 생활도 했으면 좋겠다. 이제부터 그녀를 ‘예쁜이 김태희’가 아니라 ‘배우 김태희’로 명명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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